빛바랜 대우 올드카, 부평서 다시 빛나다

국민 경차 시대 활짝 연 티코부터
‘마지막 중형’ 6기통 매그너스까지
전시장 곳곳 대우차 역사 고스란히
노조 55주년 맞아 염원 담은 행사
“회사 잉여금, 신차 개발 재투자를”
‘지속 가능 경영’ 묵직한 과제 던져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 홍보관에 대우자동차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다. 지난 5월30일 열린 ‘55FESTA 올드카 특별전시’는 노동조합 설립 55주년을 기념하는 한국지엠 패밀리데이의 부대행사로 마련됐다. 대우차 차량들이 부평공장에 공식 전시된 것은 2002년 한국지엠(당시 GM대우) 출범 이후 약 24년 만이다. 이날 전시장에 등장한 올드카들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한국 자동차 산업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업체의 저력과 역사를 웅변했다. 현대자동차나 기아와 달리 부침이 많았던 대우차의 역사는 현장을 찾은 이들에게 신기함을 넘어 짠한 감동을 선사했다. 자식을 위해 청춘을 바치고 이제는 나이 든 우리네 아버지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영광의 기억을 반추하다
전시장의 중심에는 새한자동차 시절인 1978년식 레코드 로얄이 자리해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당시 부평2공장에서 생산된 레코드 로얄은 그라나다, 푸조 604 등 당대의 경쟁 모델들을 제치고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차종으로 군림했다. 고급 가죽을 덧댄 B필러와 루프 디자인, 유럽 사양보다 출력을 높이고 연비를 개선한 1900㏄ 엔진의 현지화는 대우차 기술력의 상징이었다. 국민 경차 시대를 연 티코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신진자동차와 새한자동차를 거쳐 대우자동차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티코는 서민의 발이 됐다. 대우자동차보존연구소의 1호차인 1993년식 르망은 오펠 카데트E를 기반으로 개발돼 105만대 이상의 누적 생산량을 기록한 월드카 전략의 핵심이었다. 버건디 색상으로 통일된 씨에로와 레조 등도 저마다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다. 씨에로에는 백미러에 안전운전을 기원하는 묵주 등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운행을 하러 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형차 라인업의 발전사도 눈길을 끌었다. 대우차의 마지막 중형차이자 레간자의 후속 모델인 매그너스는 직렬 6기통 L6 엔진을 탑재해 큰 사랑을 받았다. 스포티한 감성의 이글 트림과 중후함을 강조한 클래식 트림으로 디자인을 이원화해 세대별 소비자를 공략했다. 매그너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출시 20주년을 맞은 토스카 역시 중형차 시장에서 대우차의 자존심을 지킨 모델이다.

노사가 함께 그리는 지속 가능한 미래
이번 전시는 현재 한국지엠의 수출 주력 종목인 쉐보레 트랙스 크로스오버, 트레일블레이저와 함께 배치돼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연출했다. 한국지엠의 소형 SUV들은 3년 연속 국내 자동차 수출 1위를 달성했다. 현재 글로벌 시장을 성공적으로 누비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수출 이면에는 내수 침체의 늪이 있다. 지난 5월 한국지엠의 내수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2.6% 급감한 808대에 그쳤다. 같은 기간 르노코리아(2893대)나 KG모빌리티(3318대) 실적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부평공장에서 생산하는 트레일블레이저는 44.4% 감소한 143대, 창원공장의 트랙스 크로스오버는 42.2% 줄어든 648대에 머물렀다. 결국 4만대가 넘는 수출 실적으로 간신히 체면치레를 하는 상황이다.
이번 올드카 전시는 대우차 시절의 초심과 한국지엠의 서글픈 현주소를 동시에 보여줬다. 이 자리에서 안규백 한국지엠 노조지부장은 “과거 대우차가 11개 차종을 생산해 현대차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반면 2026년 현재는 내수와 수출을 통틀어 단 4개 차종만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드카들이 전시된 홍보관 바로 옆 부평2공장은 가동을 중단한 지 오래다. 공장의 적막감은 현장을 찾은 30년 차 이상의 노조원들과 노조 간부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안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원들은 올드카를 바라보며 과거의 영광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고용 안정과 공장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서 ‘헤리티지’는 단순한 복고풍 유행을 넘어 미래 생존 전략의 핵심 자산으로 급부상했다. 오랜 기간 축적한 제조 역사와 브랜드 유산은 전기차 전환기를 맞은 신생 업체들이 단기간에 흉내 낼 수 없는 전통 업체만의 독점적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대우차가 한국 자동차 산업화 과정에서 보여준 저력과 브랜드 파워를 재조명하는 전략적 시도가 필요한 이유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자양분 삼아 부평공장의 생산 역량을 극대화하고, 글로벌 제조기지로서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한국지엠 노조는 이번 행사가 단순한 추억 투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윤용신 한국지엠지부 지도고문은 이번 전시가 한국지엠의 장기적인 경영 환경 마련을 바라는 구성원들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노조는 올해 임단협 특별요구안을 통해 회사의 이익잉여금을 신차 개발에 재투자할 것을 제안했다. 단기적인 이익 추구를 넘어 지속 가능한 경영 환경을 구축해야만 부평공장의 미래가 있다는 판단이다. 과거 산업화 시절 현대, 기아와 함께 국내 자동차 산업을 견인했던 대우차의 유산을 이제 한국지엠의 미래 경쟁력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날 이후 한국지엠 노사는 다시 마주 보고 앉았다고 한다. 본격적인 교섭 절차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올드카의 귀환은 찬란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노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묵직한 과제를 던지고 있었다.
인천 | 글·사진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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