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표소 집회 ‘갈라선 목소리’…성조기 막으며 “태극기만 오는 곳”

“여기서는 재선거 구호만 외치라니까요.”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 1만3300여명(경찰 비공식 추산·오후 4시 기준)이 운집한 ‘개표소 봉쇄 시위’ 현장 한편에서 한 남성이 “부정선거” 구호를 외치자 주변 참가자들이 일제히 제지하고 나섰다. 거대한 성조기를 든 보수 유튜버들이 등장했을 때도 “여기는 태극기만 오는 곳”이라는 항의가 쏟아졌다. 하지만 곧이어 다른 한쪽에서는 한무리의 청년들이 “부정선거”를 외치며 행진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잠실 투표소·개표소 봉쇄 시위가 나흘째 이어지는 가운데, 집회의 외연이 20~30대 청년층으로 확장되면서 참가자 내부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집회 과정에서 ‘집회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참정권 침해’와 ‘재선거’를 내세우는 이들과, 당초 주류였던 강성 ‘부정선거’ 주장파가 충돌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는 것이다. 초기 극우·음모론 성격의 집회가 청년층의 유입으로 다층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날 현장 곳곳에는 “재선거 외 정치 구호 금지”라는 내용이 담긴 대자보가 붙었다. “스탑 더 스틸”(stop the steal) 등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을 주장하는 피켓이 여전히 눈에 띄기는 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참가자들 역시 적지 않았다. 특히 지방 상경 커플이나 유모차를 끈 부부 등 젊은 세대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날 서울시 실시간 도시 데이터에 따르면, 오후 4시 기준 올림픽공원 내 실시간 인구 2만6천∼2만8천명 가운데 50%가량이 이삼십대였다. 10개월 된 아기와 함께 용인에서 온 정아무개(35)씨는 “‘윤 어게인’은 집회의 주장을 퇴색시키는 것”이라며 “부정선거라는 심증을 갖고 있더라도, 의혹만 있는 상태에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부정선거’ 구호를 고수하는 이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불만을 표출했다. 부정선거 구호를 외치거나, 성조기를 들었다가 제지당하자 일부 참가자들은 주변을 향해 “왜 하면 안 되느냐”, “시위가 이상하게 변했다”며 고성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참정권 침해’에 분노한 보수적 성향의 청년층이 집회의 폭력적·정치적 색채를 덜어내는 등 외연 확장을 꾀하면서, 시위 현장을 단지 ‘극우 시위’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워졌다고 짚는다. 이재정 불평등 물어가는 범청년행동 공동대표는 “조직에 포섭되지 않고 에스엔에스(SNS)로 결합한 청년 세대는 절차적 공정성을 중시한다”며 “특정 진영의 사주를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스스로 선을 긋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찬호 사회학자는 “보수 성향 청년들이 ‘우리도 정의롭게 투쟁할 수 있는 주체’라고 증명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고 봤다.
이러한 대중적 분노의 결집이 ‘부정선거 음모론’에 더 깊이 흡수되지 않도록 정치권이 더욱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재정 대표는 “12·3 계엄 사태 당시 시스템 붕괴를 탄핵 가결로 복원했듯, 이번 사태도 정부와 국회의 책임 있는 수습이 관건”이라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부정선거론에 호응하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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