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청남·청동학교 등 잇따라 설립… 청주 근대교육 씨 뿌려

김재근 선임기자 2026. 6. 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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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 충청의 인물과 사건] 18) 민노아 선교사 (下)
의료 활동에 큰 관심… 병원 설립 지역민 치료
충북 곳곳 순회하며 기독교 전파, 많은 교회 건립
소책자·전단 배포 등 선구적인 선교방법 창안
청주 탑동 양관 4호관(포사이드 기념관) 앞에 세워진 선교사 기념비. 민노아, 부례선, 소열도, 로간부인 등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근대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교육과 의료사업이다. 서구(주로 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성경을 전파하는 것 못지않게 교육과 의료 활동에 힘을 쏟았다. 구한말이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서학(서양의 학문)을 금지했고, 종교 포교도 제한적이었다. 상대적으로 교육이나 의료 활동을 통한 선교는 제재가 약했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를 세워 한글과 영어도 가르치고 세계 지리와 역사, 과학 기술, 수학, 보건, 화학 등 근대적인 학문을 교육했다. 농민과 여성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으며, 이를 통해 성경을 배우고 서구의 문화도 접하게 됐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깨우치고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로 거듭났다.

민노아(오른쪽)와 2번째 부인 수잔 도티 선교사.
"주 예수는 길이오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진 민노아 선교사 기념비.

민노아가 선교와 함께 가장 관심을 분야의 하나가 교육이다. 서울에서 민노학당을 운영했던 그는 청주에서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1904년 기존의 청주읍교회 청년들이 시작한 광남학교의 운영에 참여하여 근대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종교계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아내고, 설립자 겸 교장을 맡았다.

청주 청남학교에서 열린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 초청 한글강습회 기념 사진. 1932년 8월 10일 김동환 동아일보 청주지국장이 초청으로 진행됐다.
민노아(두번째 줄 가운데) 선교사와 교회 관계자들 .
청주 청남학교 30주년 행사 관련 신문 보도(동아일보 1935년 3월 21일자). 민노아(오른쪽 2번째), 소열도(3번째) 선교사와 교사인 최창남(아동문학가), 공로자 김태희의 사진이 실려 있다.

민노아는 1909년부터 청주시내에 청남학교, 청신학교, 청동학교, 청서학교, 청북학교 등을 설립했다. 청남학교와 청신여학교는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 청동학교는 청천교회, 청서학교는 신대교회, 청북교회는 묵방교회, 괴산의 곽신학교는 괴산읍교회에서 각각 운영했다. 이들 학교는 훗날 청주가 교육도시로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종교와 교육에 대한 흐름은 현재 청주의 미션스쿨인 세광중고교와, 일신여중고교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을 널리 교육한 것도 눈길을 끈다. 로건 부인(선교사)은 1909년부터 1919년 63세로 별세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청주 여성들에게 성경과 한글을 가르쳤고, 그 덕분에 많은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 거듭났다. 로건부인 사후 제자들이 청주읍교회에 한글 기념비를 세웠을 정도이다.

의료 선교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청주지부를 세우고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의료 선교사인 널(M. M. Null) 부부를 파견했고 1908년에는 부반서(W. C. Purviance) 선교사를 보냈다. 부반서는 1908년 한해 동안 진료를 2000건 이상의 수행했다. 의료진은 미국의 선진 의료기술로 많은 활자를 치료, 큰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는 마땅한 공간이 없어 밀러 선교사가 사는 사택의 방 하나를 나눠 진료실과 약방으로 사용하며 환자들을 치료했다. 장티푸스나 콜레라 등의 전염병을 낫게 하고 수술까지 해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민노아가 미국 뉴욕 던컨 부인의 기부를 받아 지은 소민병원(청주 탑동 6호 양관)은 청주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 의료시설이었다. 김재근 선임기자
5호 양관 노두의 기념관. 노두의 의료 선교사는 1929년부터 1941년까지 청주에서 환자를 돌봤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돼 재판을 받고 강제 추방당했다.

1911년에는 미국 뉴욕에 사는 던컨 부인의 기부로 병원을 건립했다. 그녀는 청주의 열악한 의료 환경 소식을 듣고 병원신축에 5000달러, 부대시설 확충에 2000달러를 기부했다. 선교사들은 '던컨 기념병원'이라 불렀고, 현지인들은 백성을 살린다(소생시킨다)는 뜻에서 '소민병원'이라고 불렀다. 1914년의 경우 여기서 초진 1940명, 재진 3074명, 입원 86, 수술 116, 왕진 29명, 기타방문 2000건을 수행했다. 1917년에는 청주읍교회에 진료소를 세웠다.

재정 형편이 나빠지거나 의사와 간호 선교사가 귀국 또는 타지로 부임하여 병원 운영에 부침을 겼었지만 1929년 노두의(D. S. Lowe) 의사가 부임하면서 안정궤도에 오른다. 노두의는 청주에서 1941년까지 근무하며 의료선교에 헌신했다. 소민병원은 1930년대 후반 매년 진료환자가 5000-8500여 명에 이를 만큼 지역사회 근대 의료기관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노두의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재판을 받고, 1941년 8월 강제 추방됐다.

민노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자신이 직접 말이나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충북의 구석구석을 순회하며 기독교를 전파했다. 한국인 조사(전도사)와 권서를 통한 선교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권서(勸書)'는 책(성경)을 판매하고 권장하는 사람으로 이들 역시 선교에 한몫을 담당했다. 민노아가 발굴한 김성화 김화복 우병찬 김정현 등의 조사와 권서는 충북 곳곳을 돌며 기독교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청신학교 사설 학술 강습회 기념사진. 1936년 3월 24일.

민노아는 다양하고 선구적인 선교방법도 창안하여 실천했다. 성경의 내용을 쉽게 풀이한 전도지와 소책자를 제작하여 나눠주며 기독교를 알렸다. 요즘은 흔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 선진적인 방식이었다. 청교도적 신앙에 기초하여 금주와 금연운동을 벌인 것도 유명하다. 금주와 금연을 담은 전도지를 교회 신도에게 배포하고, 청주시내와 시골 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캠페인을 벌였다.

전도지로 한글을 익히도록 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한쪽에 성경을 적고, 다른 한쪽에 누구나 스스로 한글을 읽을 수 있도록 자음과 모음을 배치했다. 한글을 가르치기 위한 아이디어와 노력이 돋보인다.

다양한 저술과 학술, 번역활동도 벌였다. 1913-1928년 평양신학교에서 발간하는 <신학지남>에 30여 편의 글을 실었다. 성경을 풀이한 내용도 게재하고 '가정연구'라는 여러 편의 글에는 기독교 가정의 교육에 유용한 내용을 소개했다. '리가 요록' '고린도전서 주석' '신임교인 인도' '아브라함의 역사' 등의 책도 펴냈다. 이러한 저서는 기독교 선교 초기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신도들을 성서적 삶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해냈다. 종교적 내용 뿐 아니라 과학과 자녀교육, 도덕, 상식, 취미, 보건과 위생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서양의 문물과 지식에 눈을 뜨게 했다.

민노아가 1917년에 제작한 '언문초학'. 한글을 배워가며 성경 구절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자료=청주성서신학원
민노아 선교사 찬송가비. 그가 작사한 '주의 말씀 듣고서'가 새겨져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그는 어떤 동시대 선교사보다 글을 많이 썼고 책과 전단 등을 많이 제작하여 적극 선교에 활용했다. 이 때문에 '전도지와 소책자의 왕' '문서 전도의 창시자'로도 일컬어진다

그가 지은 찬송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민노아는 빼어난 음악적 재능과 글 솜씨를 바탕으로 찬송가를 여러 편 작사하였다. 그중에서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427장 '맘 가난한 사람' 451장, '예수 영광 버리사',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5곡은 현재 한국찬송가공회가 발행한 찬송가 책에 실려 있다. 성경에 충실한 데다 미국인이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운율이 곡과 잘 어울리는 명곡이다.

민노아와 부례선 2명의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비. 부례선은 1923년 부임하여 선교활동을 하다 3년 만인 1926년 장티푸스로 29세의 나이에 순직했다.
데오도라 그레이스 솔타우 선교사 기념비.
메리 리 로간 선교사 기념비. 김재근 선임기자

□ 민노아와 함께 청주에서 활동한 선교사들

부례선 선교사(왼쪽부터), 소열도 선교사, 한부선 선교사

민노아가 청주에서 사역하는 동안 많은 선교사가 부임하여 선교와 의료, 교육 활동을 도왔다. 일제 하에서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계군(Kagin Edwin H.), 부례선(John Thomas Purdy), 한부선 (Bruce Finley Hunt), 곽안전(Allen D. Clark), 허일(Harry J. Hill), 원요한(J. T. Underwood) 등이 부인과 함께 선교활동을 했고, 예사탑(Esteb Kathlyn M.), 도민회(Minne Dave) 선교사 등은 홀로 건너와 짧게는 2-3년 길게는 20-30여년 일했다. 이들은 40여 명은 선교와 목회, 교사 교수 의사 간호사로 청주와 충북의 농촌 벽지를 돌며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과 의료 봉사에 헌신했다.

민노아는 1936년 12월 현역에서 은퇴한 뒤 필리핀과 중국 등을 여행하고 돌아와 1937년 숨졌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그가 사랑한 청주에 묻혔다. 오래 전에 사망한 첫째 부인 안나와 두 아들(프레드, 프랭크)은 서울 마포의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된 터였다.

청주 탑동의 4호 양관(포사이드 기념관) 앞에는 청주에서 사역한 여러 선교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민노아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주 예수는 길이오 진리요 생명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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