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를 이긴다는 갱년기의 엄마가 낡은 여권들고 떠나더니… [여책저책]

장주영 매경 디지털뉴스룸 기자(semiangel@mk.co.kr) 2026. 6. 7. 14: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전환기인 중년을 맞이할 테죠. 누구보다 바쁘게 일상을 살아오던 자신에게 느릿한 여유가 있는 여행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요. 화려한 명소를 소비하는 관광 대신, 스스로 선택한 고요 속에서 하루의 밀도를 채워가는 방식으로 말이죠.

프랑스 파리 에펠탑 / 사진 = 언스플래쉬
여책저책은 책 ‘날아 봐, 떠나 봐, 나를 봐’를 통해 인생 후반전을 단단하게 채워나갈 용기와 삶의 이정표를 만납니다.
날아 봐, 떠나 봐, 나를 봐
김경아 | 미다스북스
사진 = 미다스북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사춘기. 모든 것이 싫고, 청개구리 삶을 살고 싶을 때가 바로 이 시기다. 하지만 혹자는 어마무시한 사춘기를 이기는 것이 갱년기라고 한다. 특히 엄마의 갱년기는 사춘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갱년기는 단순한 신체적 노화를 넘어 ‘엄마’와 ‘아내’라는 사회적 역할의 변화와 맞물린다. 거대한 심리적 지진이라고까지 할 만큼 요동친다.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음에도 문득 찾아오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과 무기력 앞에 서면 삶의 궤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불안에 휩싸인다.

​책 ‘날아 봐, 떠나 봐, 나를 봐’의 저자 김경아는 이 무거운 갱년기라는 신호탄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낡은 여권을 챙겨 들고 길 위로 나섰다. 이 책은 50대라는 생의 중간 지점에서 조용히 비행 방향을 바꾸어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걸어간 성실하고 담담한 치유의 기록이다.

저자는 “살고 싶어 떠났고, 돌아와 피어났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닌 가장 미덕 있는 지점은 시중의 수많은 가이드북처럼 극적인 치유를 성급하게 선언하지 않는다. 책은 흔들리는 상태 그대로의 삶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미국 옐로스톤 / 사진 = 언스플래쉬
​미국 옐로스톤의 압도적인 대자연 속에서 비로소 팽팽했던 숨을 고르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타인에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배운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을 유랑하면서는 트램의 속도에 맞추어 자신의 걸음을 재조정하고, 늘 공사 중인 도로를 보며 우리의 인생 역시 끊임없이 보수해 나가는 과정이다.

​관광지의 화려한 이면을 들추는 대신 철저히 저자 개인의 감정 지형을 따라 이동하는 여정은 독자들에게 묘한 동질감과 위로를 선사한다. 책은 중년 여성이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나이가 들며 변화하는 몸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옷차림 하나에도 검열을 붙여야 했던 억압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와 독일의 거리에서 나답게 입는 법을 배우는 저자의 모습은 유쾌하면서도 눈물겹다.

​바티칸 피에타 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딸이었고 엄마였고 마침내 나’라는 주체적인 존재로 우뚝 서는 순간은 이 책의 백미다. 저자는 낭만적인 풍경 이면에 숨겨진 우울과 불안, 노화의 징후들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억지로 이겨내려 애쓰기보다 삶의 무게중심을 ‘잘 버티는 삶’에서 ‘조금 덜 애쓰는 삶’으로 미세하게 옮겨갈 뿐이다.

바티칸 성당 피에타 / 사진 = 언스플래쉬
​프랑스 에펠탑의 위트나 크로아티아의 파란 의자 하나에 깃든 침묵 속에서 저자가 써내려 간 문장들은 멀리 가는 것보다 무엇을 내려놓고 돌아오는지가 더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건강하게 잘 자란 할머니가 되기 위해 오늘도 읽고 쓴다는 저자의 다짐처럼 이 책은 화려한 성취 대신 작고 소중한 것들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는 폭주를 멈추고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싶다면 이 책이 제안하는 느린 걸음에 동참해 볼 일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비로소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은 일상의 복잡한 소음을 끄고 온전한 나를 마주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조용한 착륙 지점이 돼줄 것이다.

※ ‘여책저책’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세상의 모든 ‘여행 책’을 한데 모아 소개하자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출판사도 좋고, 개별 여행자의 책도 환영합니다. 여행 가이드북부터 여행 에세이나 포토북까지 어느 주제도 상관없습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알리고 싶다면 ‘여책저책’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