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의 사대’는 어디 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화성 시설물 중 동장대 터가 가장 넓다. 넓은 만큼 3개의 대로 이뤄졌다. 아래부터 하대, 중대, 상대라 부른다. ‘대(臺)’란 경사진 지형을 주변보다 높게 조성한 터를 말한다. 동장대 터는 원래 경사지였다. 위에서 아래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두 방향 모두 경사진 땅이었다. 대를 세 개 정도 만들어야 장대의 용도에 맞는 공간이 됐다.
하대는 동장대로 들어가면 만나는 첫 번째 너른 터다. 출입문은 3문으로 세웠다. 임금의 출입을 고려한 설계다. 하대 양쪽에 집이 있다. 동장대를 보조하는 공간이다. 중대는 하대에서 와장대로 올라가면 만나는 터다. 와장대는 말을 탄 채 중대로 올라갈 수 있게 한 경사로다.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시설이다. 중대에는 크고(大) 붉은(紅) 나무 깃대(桅杆)인 대홍위간이 좌우로 하나씩 서 있다.
상대는 중대에서 돌계단으로 올라선다. 상대에는 큰 집(大厦)이 있다. 기본적으로 장수가 주재하는 전투지휘소다. 임금이 수원에 있는 경우 동장대와 서장대는 임금이 주재한다. 서장대에는 ‘화성장대’란 편액이 걸려 있고 이곳 동장대에는 ‘연무대’란 편액이 걸려 있다. 동장대 옆이 병사훈련장이어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연무대는 성역 당시 주어진 별칭이 아니다.

의궤에 중대를 설명하며 “총수가 숨어 쏘기 편하게 하였다”란 특이한 설명이 있다. 이는 중대에 총 쏘는 사대를 만들었는데 적으로부터 은폐하며 총을 쏘기에 편한 곳이라는 의미다. 문제는 이 ‘총수의 사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디가 총수의 사대일까.
중대는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총수의 사대도 복잡한 구조는 아닐 것이다. 병사가 총을 쏘는 장소라면 단순한 구조에 크기도 클 텐데 왜 찾기가 어렵다는 것일까. 이유는 사람의 인식 때문이다. 찾기도 쉽고, 찾았지만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동장대 현장으로 가보자. 중대에 서면 누구나 사대로 딱 한 곳을 지적한다. 하대와 중대 사이에 턱이 진 부분이다. 현재 잔디가 깔려 있다. 높이는 중대 높이의 절반이고 폭은 4척이다. 높이와 폭이 의궤와 일치한다. 이곳이 확실한 이유는 중대에서 이곳 외에는 모두 평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왜 총수의 사대를 찾기 어렵다고 할까. 이유는 이렇다.
이곳이 총수의 사대라면 우리 병사의 총부리는 전면을 향하게 된다. 전면에는 동장대 건물이 있다. 동장대 건물은 그곳에 주재하는 장수와 동일하게 인식된다. 그래서 이곳을 사대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 병사가 우리 장수에게 총을 겨눈 모습이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사대임을 알면서도 사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궤에 총수의 사대라 한 것은 아마 성을 넘어 동장대에 들어온 적을 겨누는 상황을 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도 인정되지 않는다. 동장대 안으로 들어온 적을 향해 쏜다는 전제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이 동장대로 들어왔다는 상황은 화성 전체의 함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장대 점거는 지금으로 보면 수도경비사령부가 점령당한 것과 같은 꼴이다. 서장대와 동장대는 화성의 마지막 보루다.

그러면 왜 총수의 사대를 만들었을까. 당초부터 총수의 사대를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사대와 전혀 다른 목적에서 출발한다. 무슨 목적이었을까 살펴보자. 하대와 중대의 높이 차이는 7척5촌이다. 당시 낮은 차이는 아니다. 동장대 3개 대 중 가장 높다. 흙을 깎고 이 높이만큼 대를 만들어야 했다. 흙을 깎은 수직면, 즉 절토면은 붕괴되면 안 된다. 절토면 안정 공법이 필요했다.
지금은 다양한 공법이 있다. 높이와 지질에 따라 철근콘크리트 옹벽, 보강토 공법, 숏크리트 뿜칠, 어스 앵커 공법 등 여러 공법 중 선택한다. 당시는 재료나 공법이 단순했다. 그저 무겁고 큰 돌을 쌓는 방법뿐이다. 돌의 무게가 밀려오는 토압을 버텨야 했다. 동시에 외관도 갖춰야 했다. 장대석 쌓기가 최적의 선택이다. 하지만 장대석 쌓기에도 약점은 있다.
첫째, 재료는 좌우로 긴 모양의 돌이다. 두껍지 않고 속길이가 길지 않아 자재 자체가 무겁지 않다. 이런 장대석으론 토압을 견디기에 한계가 있다. 속길이가 길어야 무게도 커지고 토압을 견디기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둘째, 시공 방법은 아래부터 위로 쌓아 올리는 조적식이다. 사실상 얹어놓는 방식이다. 당시는 땅속 깊이 고정하는 앵커링이 없어 밀리거나 떨어져 나가기 쉽다. 또 쌓은 층 사이에 틈이 있어 장기간에 걸쳐 물이 침투하고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 흙이 팽창해 균열이 생긴다. 균열 이후 붕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책은 가능한 한 토압을 줄이는 것이다. 같은 장대석으로 토압도 견디고 미관도 좋게 할 해결책은 없을까. 대안은 장대석 1단 쌓기를 2단 쌓기로 바꾸는 것이다. 같은 장대석이라면 토압을 나누는 것이 좋다. 의궤에도 ‘우작일층(又作一層), “또 한 층을 더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
아래부터 절반 높이까지 1단 장대석을 쌓고 4척을 밀어 깎아 2단 장대석을 쌓는 설계로 바꿨다. 중대 높이의 ‘절기고지반(折其高之半)’, “중간에서 꺾어” 높이를 둘로 나눠 토압을 분산 감쇄하는 공법이다. 이렇게 2단 쌓기 하며 1단과 2단의 사이에 ‘초퇴사척(稍退四尺)’ “4척쯤 물린” 공간이 생겼다. 이 공간이 ‘총수의 사대’다.
이래서 총수의 사대‘는 처음부터 사대를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했다. 구조 안전 측면에서 2단 쌓기로 하니 생긴 부산물이다. 그런데 의궤는 이 부분을 쓸모 있는 공간으로 바꿔 기록했다. 성역 총책임자인 감동당상 조심태가 성역 후에 의궤작성 총책임자인 의궤당상을 맡아 가능했다.
총수의 사대가 의궤 기록 간 차이가 있다. 설명(說)에는 2단으로 너비는 4척이다. 그런데 그림(圖)에는 3단이다. 설명과 그림이 일치하지 않으면 설명을 우선한다. 복원 전의 사진에도 2단의 흔적이 보인다. 원형과 복원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원형은 바닥이 돌인데 복원은 잔디를 덮었다. 원형이 맞다. 토압을 버티는 데 돌판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동장대 ‘총수의 사대’를 찾아보며 구조 안정과 사대 기능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챙긴 감동당상 조심태의 의도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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