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내려가자 극장가 다시 ‘썰렁’…콘텐츠 승자독식의 시대

2026년 설 연휴,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한국 극장가를 휩쓸었다. 개봉 31일 만에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하더니 1600만 명을 넘기며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극 장르에서 발상의 전환과 시의적절한 주제의식이 빚어낸 쾌거였다. 코로나19 이후 좀처럼 활기를 찾지 못하던 극장가에 반가운 소식이었고, 업계에선 이 열기가 극장 관객의 전반적인 회복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왕사남이 스크린에서 내려가자 극장은 다시 텅 비었다. 한 시민단체의 관람객 설문에서 응답자의 약 68%가 ‘티켓 가격 부담'을, 48%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더 편하다'를 극장 관람 감소 이유로 꼽았다. 왕사남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골목에 한 집만 번성하는 건 그 골목과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 현상의 주역이 지금의 모순점을 정확히 짚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지금 벌어지는 이 현상은 단순히 영화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디지털 콘텐츠 시장 전체에서 소수의 콘텐츠가 거의 모든 관심과 수익을 빨아들이는 ‘하이퍼 파레토’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인터넷이 약속했던 ‘롱테일’의 시대가 저물고, 그 자리를 승자독식의 새로운 질서가 채우는 것이다.
잘려나가는 긴 꼬리
한동안 이 법칙은 디지털경제의 황금률처럼 통했다. 아마존은 매출의 절반을 덜 팔리는 서적에서 올렸고, 주요 스트리밍(실시간 재생) 플랫폼은 대작이 아닌 다양한 틈새 콘텐츠로 구독자를 묶어뒀다. 음악 스트리밍에서는 히트곡보다 개인 취향에 맞춘 플레이리스트가 전체 청취량을 이끌었다. 다양성이 곧 경쟁력이었고, 창작자들은 누구나 롱테일이 만든 다양성 가득한 디지털 창작 세계를 마음껏 누빌 수 있었다.
그런데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긴 꼬리가 급격히 잘려나가고 있다. 전통적인 80 대 20의 파레토 법칙을 넘어 맨 꼭대기의 극소수 콘텐츠가 전체 조회수와 수익의 압도적 몫을 차지하는 하이퍼 파레토 현상이 콘텐츠 시장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왕사남 사례가 극장가에서의 대표적 예라면, 콘텐츠산업의 다른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확인된다. 대표적 ‘풀뿌리 지식재산권(IP)’의 보고인 웹툰과 웹소설 시장이 그 예다. 웹툰의 산업 매출액은 2조원을 돌파하며 6년 연속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그 열매는 극소수에게 돌아가고 있다.
출판 시장도 마찬가지다. 업계 조사에 따르면 매출 50억원 이상의 대형 출판사들은 경기가 좋아질 것으로 내다본 반면, 50억원 미만의 중소형 출판사들은 어려움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음악 시장에서도 쏠림은 뚜렷하다.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의 수익 나누기 방식 자체가 승자독식을 부추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롱테일의 꼬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이 현상의 뿌리에는 기술적 구조만이 아니라 깊은 사회심리적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FOMO(Fear of Missing Out), 즉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최근 국내의 한 학술 연구는 디지털 기술과 소셜미디어의 확산이 FOMO를 키우고, 이것이 남들 따라 하기 경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FOMO는 단순한 유행 따라가기가 아니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욕구’와 깊이 맞닿아 있는 현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집단에 속하고 그 안에서 관계를 이어가려는 본능적 욕구를 가졌는데, 소셜미디어가 이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왜 모두 같은 것을 보는가
이 사회적 심리 흐름을 기술적으로 증폭하는 것이 숏폼 콘텐츠와 알고리즘의 결합이다. 국내 조사에 따르면 OTT 이용자의 72%가 최근 1년 이내 숏폼 콘텐츠를 경험했고, 한 미디어 기업의 리포트에선 10대가 전체 평균보다 31분 더 숏폼을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 숏폼 환경이 콘텐츠를 발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서점을 둘러보거나 극장 상영표를 훑으며 다양한 선택지를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밀어주는 30초짜리 밈과 리뷰 클립이 콘텐츠 선택의 거의 전부를 좌우한다. 알고리즘은 이미 인기 있는 콘텐츠를 더 많이 띄우고, 더 많이 띄워지면 더 많이 소비되고, 더 많이 소비되면 다시 알고리즘의 밀어주기가 강해진다. 정리하자면 FOMO가 사람들을 ‘모두가 보는 것'으로 몰아가고, 알고리즘이 그 쏠림을 기술적으로 키우고, 정보 거품이 다양한 선택지를 구조적으로 막아버리는 세 겹의 고리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 현상을 한쪽으로만 나쁘게 볼 수는 없다. FOMO에 의한 관심의 집중은 콘텐츠산업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왕사남 사례가 보여주듯 하이퍼 파레토 현상은 콘텐츠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사회적 공유 경험이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1600만 명이 하나의 영화를 보고 웃고 울었다는 것은, 디지털 시대에 점점 드물어지는 ‘함께 나누는 문화 경험'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소셜미디어에서 같은 작품에 대해 감상을 나누고, 밈을 만들고, 관련 역사 지식을 찾아보는 과정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유대감이기도 하다. 실제로 왕사남의 흥행 이후 조선왕조실록 관련 도서 판매가 2배 이상 늘어나고, 강원도 영월 지역의 관광객이 급증하는 등 하나의 콘텐츠가 줄줄이 문화 소비를 불러일으키는 긍정적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거기에 콘텐츠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지금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를 모두 소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도 다 보는 ‘검증받은 콘텐츠’ 위주로 소비하는 지금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긍정적 효과가 점점 극소수의 ‘당첨자'에게만 쏠린다는 점이다. 하이퍼 파레토 구조에서 관심의 집중이 만드는 혜택은 맨 위의 콘텐츠에 몰리고, 그 아래의 넓은 창작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그늘로 밀려난다. 초대형 히트작 하나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파급 효과의 무대 뒤에서 창작자 수천 명이 조용히 떠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잘려나간 꼬리를 되살리는 지혜
하이퍼 파레토 현상이 위험한 이유는 단기적으로 몇 편의 초대형 히트작이 시장을 떠받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콘텐츠 시장 전체의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소수의 초대형 히트작만 살아남는 구조는 결국 창작의 토양 자체를 메마르게 한다. 창작자들이 새로운 도전을 피하고 일부 잘되는 장르에만 집중하는 장르 쏠림 현상도 결국엔 ‘뻔한 양산형’ 콘텐츠만 가득하게 만들어버리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롱테일 법칙이 나온 지 20년이 넘었다. 그때의 낙관은 틀리지 않았지만 완전하지도 않았다. 인터넷은 창작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관심의 장벽을 낮추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관심은 더욱 귀한 자원이 됐고, 그 귀한 자원은 FOMO라는 인간 본연의 심리와 알고리즘이라는 기술적 확성기에 의해 소수의 초대형 콘텐츠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왕사남 1600만 관객의 쾌거는 한국 콘텐츠의 저력을 증명한 동시에, 한 편의 초대형 히트작이 한순간의 심폐소생술은 될 수 있어도 시장의 체질은 바꿔주지 못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드러냈다. 1등만 살아남는 콘텐츠 시장을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잘려나간 롱테일의 꼬리를 되살리는 일은 이제 콘텐츠산업의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주어진 과제가 되고 있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칼럼니스트는 업계 경력 20년 이상의 콘텐츠산업 전문가다.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며, 콘텐츠 제작과 금융이 전문이다. 일본 게이오대학원을 졸업하고 LG인터넷과 SBS콘텐츠허브 등에서 방송·게임·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콘텐츠 금융과 관련한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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