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털을 깎으려는 사람들에게 [임보 일기]
‘고양이 무마취 미용’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알고리즘을 타고 광고 영상이 자꾸 뜬다. 화면 속 고양이는 그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고양이와 함께 화면에 등장한 인간의 손은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고양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고양이의 발톱에 상처입지 않도록 능숙하게 고양이를 제압한다. 두 손으로 부족해서 다리 사이에 고양이를 끼운다. ‘전문가’는 주짓수 기술을 익힌 듯 고양이의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털을 깎는다. 영문도 모르고 힘으로 제압당한 고양이는 탈진한 채 저항을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고양이는 끝날 때까지 저항한다. 이내, 화면 속 고양이는 온몸의 털을 잃고 그 모습에 누군가는 만족스러워한다.
화면에는 그 화난 모습마저 ‘귀엽다’는 글자를 박는다. 공감이라는 게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가? 목숨에 위협을 느낀 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그저 반찬 투정하는 아이의 뾰로통함 정도로 보이는 것일까? 단언컨대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 힘으로 제압당하며 털을 밀리는 고양이는 자신이 이대로 죽을 수 있다는 실질적 공포를 온몸을 동원하여 느낀다. 교감신경계가 과활성화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은 전신 조직의 수용체와 결합하여 즉각적으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심박수와 호흡은 급상승하고 혈당이 치솟으며 근육은 자신에게 필요한 혈액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수축하여 쥐가 나거나 경련을 일으킬 수 있다. 귀엽다고 웃어넘기기엔 고양이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그렇게 꽉 잡히도록 진화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몸을 움켜잡고 털을 깎는 행위는 개에게도 극심한 스트레스다. 일평생 털 깎이는 끔찍한 경험은 없는 게 훨씬 좋다. 그러나 적어도 개는 동료들과 몸을 부대끼며 서로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늑대에게서 진화했고, 사람과 함께 사는 과정에서도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 일상적 신체접촉이 중요했다. 반드시 털을 깎아야 한다면 맛있는 간식을 주면서 클리퍼와 가위에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털 깎는 일을 놀이로 즐기는 것도 개에게는 가능하다. 그런데 고양이는 완전히 다른 동물이다. 고양이의 조상도, 현대 고양이도 누군가에게 물리력으로 통제당하는 사건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일 외에는 없었다. 고양이가 남과 몸을 부딪치는 일은 먹이를 잡거나 반드시 지켜야 할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동족과 싸우는 일뿐이었다. 둘 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그 ‘미용’은 오롯이 소유자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고양이에게 강제하는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털이 밀린 모습은 고양이에게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 털 날림이 문제라면 아프지 않은 빗으로 매일 잘 빗어주기만 해도 훨씬 덜하다. 일부 인위적 근친교배 반복으로 만들어낸 품종 묘의 긴 털은 뭉친 부위만 집에서 가위로 살살 잘라내어도 충분하다. 고작 알레르기 정도로 반려하는 존재를 공포에 몰아넣는 식의 사랑이라면 합의 없는 가학증에 불과하다. 강제로 털을 미는 행위에 ‘교감 미용’ 같은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사랑의 매’로 때리며 ‘감사합니다’를 외치라는 꼴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털을 잘라야 한다면 마취를 하는 편이 고양이에게 훨씬 이익이다.
기어코 털이 긴 개를 데려다가 평생 털을 미는 독특한 개 사육 문화가 한국에는 만연하다. 동물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동물의 사정을 몰라서일 테다. 개에 이어 이제는 한국의 고양이들이 너무도 가여워지는 중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존재들을 일상적으로 죽음의 공포에 밀어 넣는 실수는 그만하면 좋겠다. 고양이에게는 털을 잘라야 할 이유가 없다. 목욕도 평생 필요 없다.
최태규 (수의사·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활동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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