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에 미군 막사로”…‘미군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미군 위안부①]

이유민,정준희 2026. 6. 7.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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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는 세월동안 가슴에 묻어둔 말들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름대신 '미군 위안부'로 불렸던 사람, 김용순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60년 넘게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취재진이 김용순 할머니를 만난 건 때 늦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5월 이었습니다.

파란 숄을 걸치고 모자를 쓴 할머니는 신발을 곱게 정리한 뒤 실내화를 신고 들어왔습니다.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얘기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내젓는 손 끝에선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타는 목을 달래려 물을 연신 마셨지만, 긴장이 멈추지 않는지 테라스로 나가 몇 번이고 숨을 골랐습니다.

60년 넘게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는 그제서야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 열다섯, 공장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기지촌으로


'공장'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차에 올라탔을 때 김 할머니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살이었습니다.

친구 소개로 동두천으로 향했지만 '공장'인줄 알고 도착했던 그 곳은 미군 기지 인근 포주집이었습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친구는 도망쳤고 남겨진 건 김 할머니 혼자 뿐이었습니다.

잠시 뒤 들어온 한국인 포주는 약을 먹였고, 그렇게 도착한 날 기억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다음날부터 '지옥'은 시작됐습니다.

누우면 발 끝이 벽에 닿을 것만 같았던 2평짜리 방이 김 할머니 세상의 전부가 됐습니다.

좁디 좁은 방에서 나가는 것을 꿈꿀 수 조차 없었던 매일.

포주는 열다섯살 소녀가 살고 있는 작은 방 문고리에 숟가락을 집어넣어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그리고 그 곳엔 매일 미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 미군 부대 안 막사에서도 피해…거부하면 폭력


할머니는 지프차에 실려 미군 기지 안으로도 향했습니다.

도착한 미군 기지 안에선 미군 매니저가 할머니의 이름과 성병 검진 여부가 적힌 보건증을 검사했습니다.

부대 안 빈 막사에 발가벗겨진 채로 누워있으면 밖에서는 미군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김 할머니는 평생 그 순간이 가장 무서웠다고 말했습니다.

맞아 죽을까봐 수많은 미군을 견뎌야 했습니다.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군의 요구를 거절하면 어김없이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그 때, 할머니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이었습니다.

■ '토벌'과 컨택'…성병 걸리면 마구잡이로 지목


방 안에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미군이 성병이라도 걸리기라도 하면 마구잡이로 한국 여성들을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미군들은 위안부들의 이름·사진이 있는 장부, 일명 VD BOOK (성병책자)를 보고 직접 여성들을 찍었습니다.

할머니와 곁에 있던 친구들이 정말로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내수용소'라고 불리는 곳에 끌려가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바로 옆에서 주사를 맞고 덜덜 떠는 친구, 거품을 물고 쓰러진 친구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모두 주사 부작용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군의 무차별적인 토벌(여성 지목)과 컨택(구금)은 '미군 관리'라는 명목 아래 멈추지 않고 계속됐습니다.

■ 군산 부대에서도 주스와 술을 팔며


지옥같던 하루하루를 견디던 할머니는 결국 군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도착한 곳은 일명 '달러 공장'으로 불리던 군산 미군 부대 인근 클럽.

'이름표'와 '검진표'를 달고 부대 정문을 들어섰습니다.

부대 정문을 지나 오르막길을 따라가보니 '토끼장' 같은 3평이 채 되지 않은 숙소를 안내받았습니다. 작은 깔개와 이불이 살림의 전부였습니다.

클럽에선 일명 '주스'와 '술'을 팔며 같은 일을 당해야했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미군이 무서워 '(성매매를) 하지 못한다'고 하면, '보복성'으로 할머니에게 성병이 걸렸다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면 부대병원에선 할머니를 끌고 가 페니실린 주사를 놨습니다.

성매매를 못하겠다고 거부할 때마다 미군은 할머니를 때렸습니다. 보호는 없었습니다.

그저 위안부들에게 '잘 접대하라'는 교육만 돌아왔습니다.

■ 15살 소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10대 시절 대부분을 기지촌에서 견디며 15살 소녀는 20살 어른이 됐습니다.

미군에게 맞아서 파출소로 달려가도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그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미국 같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한국정부도, 미국 정부도 어린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너무 답답할 때면 밤마다 기지촌 앞 동산에 올라가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순찰하던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곳이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6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어느 곳에서도 그 마음을 풀지 못했습니다.

■ "미안하다고 진짜 사과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2022년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고 나서야 정부와 미군의 잘못을 알게 됐습니다.

평생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온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용기를 내 나선 자리였지만 당시 이야기를 말할 땐 여전히 숨이 가빠져왔고, 눈물이 나는 걸 계속 참아야 했습니다.

마주 앉은 기자의 손을 잡은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떨렸습니다.

'(기자가) 아직 어린 나이인데, 안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며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 소송에 참여한 언니들과 함께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60년 넘게 숨겨왔던 말을 세상에 내놓은 할머니,

이제 그녀의 바람은 딱 하나입니다.

"미국 정부도 알면서도 다 우리를 이렇게 시킨 거 아니에요. 그걸 억누르고 여태껏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서 이렇게 잘못된 줄 알고. 맨날 말소리도 못 내고 숨어 살고 그랬는데, 미국 정부나 한국정부나 다 서로 지금 보니까 알고도 우리를 감싸주지 않았잖아요"

"미국 사람들이 사과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산다고 해도 10년 20년 더 살겠어요? 진짜로 남은 건 병 밖에 안 남았어요. 미국 사람들이 하루 종일 사과하고 언니들한테도 미안하다고 진짜 사과했으면 좋겠어요."

- 김용순 할머니 / 미군 위안부 피해자 -

취재 : 이유민
촬영 : 정준희
편집 : 염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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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민 기자 (toyou@kbs.co.kr)

정준희 기자 (toe2to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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