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실패한 이성애자들이여, 퀴어에게 사랑을 배워라"
제인 워드 '이성애의 비극'

잠시 '부부 관계'를 소재로 하는 TV 프로그램 출연진의 대사를 떠올려보자. "아내 샤워 소리가 겁난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다" "부부는 전생의 원수지간이다" "싱글일 때가 좋았다" 등 푸념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방청석의 공감 섞인 탄식도 자동 재생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인류 역사상 '가장 본능에 충실하고 정상적'인 형태의 성적 지향으로 받아들여진 이성애 관계가 어째서 갈등을 반복해 왔는지, 어쩌면 이성애는 그 뿌리와 과실이 빈약한 '신화'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이런 문제의식을 건드려 미국 젠더 담론을 뒤흔든 화제작 '이성애의 비극'이 한국에 당도했다. 원저는 2020년 나왔는데, 출간 이듬해 미국 출판계가 한 해 최고의 연구 결과를 담은 도서에 수여하는 '프로즈 어워드' 수상작(문화인류학·사회학 부문)으로 선정됐다.
저자는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페미니즘 연구학과 학과장이면서 스스로를 '레즈비언 페미니즘'으로 정의하는 제인 워드다. 그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성애가 힘든 이유는 이성애 문화 자체에 구조적으로 내장된 여성혐오 때문이다. 퀴어들은 이성애 문화를 안타깝게 여긴다."
극단적일 땐 치료의 대상, 보다 일반적으로는 이단아로 여겨지는 비이성애가 이성애보다 나은 면이 있다는 워드의 도발적 주장에 서문도 넘기지 못할 독자들이 적지 않겠지만, 책은 차분하게 이성애자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에서 겪는 현실을 나열한다. 꾸밈노동, 성폭력, 가정폭력, 독박가사 등이다.
저자는 남녀 관계가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의 근원을 찾고자 이성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성애는 '번식 목적 이외의 성애적 행위'를 일컫기 위해 탄생했고, 여기에는 남성이 '열등한' 여성에게 애정적으로 끌리는 건 비정상적이라고 치부하는 시대적 풍조가 반영됐다. 요컨대 이성애는 여성혐오의 씨앗이 심긴 부정적 개념으로 출현했다는 얘기다.

남녀 간 친애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등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길 독자를 위해, 워드는 '진정한 로맨스'는 남성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온 역사가 매우 깊다고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경우, 성인 남성과 소년의 성적 관계는 동반자적 관계로 존중받았고 남성 유대 강화를 명분으로 장려되기도 했다.
20세기에는 이성애에 우생학의 망령이 드리운다. 백인 재생산을 돕기 위해 전문가가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좋아하도록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튼 것. 20세기 중반엔 심리학과 사회학이 주목받으면서 여성이 남성을 배려하고 신체를 가꿔야 가정이 평화로워진다는 기조가 퍼졌다.
이성애를 파탄 내는 여성혐오가 남녀 관계를 가꿀 해법으로 제시되는 모순에 맞서 페미니스트들은 "성 역할은 사회적 산물로 변화 가능하다"고 강조했지만, 세기의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이런 노력에 찬물을 뿌렸다. 여성혐오 구조를 혁파하는 대신 '심리적 타협'이라는 미봉책을 진리처럼 퍼뜨린 것.
21세기 들어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데이트 코칭 산업은 이런 자기계발서의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부당함을 아는 남성이라야 여성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 식의 강의는 '페미니즘적'이라 할 만하지만, 여성에 대한 소유의식을 흔들지는 못한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이 지점에서 워드가 해결책으로 나아갈 징검다리로 제시하는 게 '레즈비언 페미니즘'이다. "퀴어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성애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란 통념과 달리 퀴어들이 이성애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이성애자들이 퀴어의 다채롭고 주체적인 관계 맺기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퀴어 관계 가운데 여성 간 결합인 레즈비언을 참고해야 할 이유로 저자는 이성애의 비극이 여성혐오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재차 일깨운다. 게이의 경우 이성애를 포기함으로써 잃을 게 많은 생물학적 특수성 때문에 퀴어의 시련 서사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덧붙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 남성이 퀴어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저자가 내놓는 해결책은 '깊은 이성애', 즉 레즈비언이 그러하듯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욕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소 김빠지는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이성애에 퀴어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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