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골드러시[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웹툰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만 소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없던가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읽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더 재밌을 지 모릅니다. ‘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는 이야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콘텐츠입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식민지 조선의 황금광 시대
문학작품은 때로 시대상이나 공간을 기록한다. 1930년대 서울의 풍경을 엿보고 싶다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권한다. 이 소설은 소설가 구보가 노트를 들고 하루동안 경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찰한 도시와 풍속을 오롯이 담고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박태원이 1934년8월1일부터 9월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30회 연재한 중편소설이다. 신문 연재소설이다보니 삽화가 있는데 삽화를 그린 이는 하융이라고 돼 있다. 하융이 누굴까. 소설가 이상이다. 박태원과 이상은 막역한 친구였고, 구인회 멤버였다.

구보는 박태원의 호다. 그러니까 소설 속 주인공 구보는 사실상 박태원 본인이다. 구보는 도쿄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지금은 뚜렷한 직장없이 소설로 푼돈을 벌고 있는 26세의 청년. 이날도 구보는 점심께 느즈막이 일어나 집을 나선다. 천변길을 따라 광교로 걷다가 종로네거리로 갔다가 전차선로를 건너 조선인 자본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상회 안으로 들어간다. 상회를 나와 전차를 탄다.

전차는 훈련원을 지나 약초정을 지난다. 약초정은 지금의 을지로 3가와 중구 저동 부근이라고 한다. 조선은행앞에서 내린 구보는 장곡천정, 즉 소공동으로 향한다. 다방에 들러 가배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잠시 쉰 구보는 부청, 즉 서울시청쪽으로 걷는다.
고현학으로 들여다본 1930년대 식민지 경성
구보는 이 여정에서 행복해보이는 젊은부부, 예전에 선을 보았던 여성, 과거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던 한 남자를 만나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구보는 특별한 사건없이 그저 거리를 걸으면서 마주치는 풍경들, 사람들을 보며 머릿 속에 떠오르는데로 파편화된 상념과 기억, 감상을 기록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라 ‘발단-전개-위기-절절-결말’로 스토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구보씨의 일일>은 특별한 사건이 없다. 생각의 흐름을 좇아 내면적 심리변화, 파편화된 현실에 집중하는데 이는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이유다.

구보는 걷다가 창작을 위해 서소문정 방면으로 답사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든다. 그러다 곧 “‘모데로노로지오’를 게을리 하기 오래다”라고 자책한다. 모데로노로지오란 모더놀로지(modernolgy) 즉 고현학을 말한다. 고현학(考現學)이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현재를 고찰하는 학문’이다. 땅속에 묻힌 과거의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 옛날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는 ‘고고학(Archaeology)’처럼 거리의 옷차림, 건물, 가방안 소지품, 지하철 안의 풍경 등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유행, 풍속, 사람들의 일상과 행동 양식, 문화현상을 분석한다.
이 시대의 무직자는 금광 브로커다
뙤약볕을 이고 걷던 구보는 경성역 대합실로 들어가는 데, 개찰구 앞에서 낡은 파나마 모자에 모시 두루마기 노랑구두를 신은 두명의 사내를 만난다. 구보는 한눈에 이들이 무직자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면서 대합실 안팎을 둘러보는데, 이곳저곳에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구보는 말한다. “이 시대의 무직자들은 거의다 금광 브로커가 틀림없다”고.

1930년대 조선에는 골드러시가 있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무수한 광무소가 산재해 있고, 출원 등록된 광구는 조선 전땅의 칠할이었다고 당시의 시대상을 기록한다. 또 인지대는 백원, 열람비는 오원, 수수료는 십원, 지도대는 십팔전이었다며 광산개발 허가 비용도 언급한다. 구보는 말한다. “지금은 시시각각 사람들이 졸부가 되고, 또 몰락해간 황금광시대”라고. 그리고 이런 사람들 무리에는 평론과 시인 같은 문인들도 끼어있었다고 증언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초판본(1938·문장사)[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연합뉴스](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6/07/khan/20260607070122496xwgd.jpg)
1930년대 조선에는 어떻게 일확천금을 꿈꿀 수 있는 골드러시가 생겨났을까? 여기에는 식민지를 수탈하려는 일제의 산금(産金)정책이 있었다. 1930년 대공황으로 국제금융질서가 무너지면서 금본위제를 지탱하는 금의 가치가 폭등했다. 여기에 1931년 만주사변으로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일제는 조선에서 금 생산을 독려하는 산금정책을 강력하게 폈다. 시설 자금을 보조해주거나 금 채굴 절차를 간소화해주면서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금광 사업에 뛰어들도록 했다.
앞서 조선광업령에 따라 땅주인이 누구든 상관없이 땅 아래에 있는 광물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됐다. 조선총독부는 광산개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광업권을 내줬다. 채굴할 수 있는 권리인 광업권은 전매가 가능해 그 자체로도 큰 돈이 오갔다. 대공황으로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도시에서도 많은 공장이 무너지자 지식인, 농민,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가 금광을 찾아 산으로 들로 뛰어들었다. 경교장을 지은 최창학,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 화신상회를 인수했던 박흥식이 광산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이었다.
네델란드병, 식민지 조선을 덥치다
하지만 황금광시대는 조선경제를 부흥시키지는 못했다. 정보를 독점한 일본인이나 소수의 친일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중들은 금맥을 찾을 수 없었다. 글을 써야할 지식인이나 농사를 지어야할 농민들이 생산적인 일을 포기하고 광산투기에 뛰어들면서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혼란은 더 커졌다.
광산개발로 번 돈은 공장설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백화점 등에서 사치소비나 또다른 투기로 흘러들었다. 경성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자립적인 경제적 토대는 마련되지 않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이른바 네델란드병이 조선사회를 강타했다.
네델란드병(Dutch Disease)이란 특정 천연자원의 생산이 급증해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면 일시적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지만, 그 때문에 국가 전체의 제조 및 서비스업 경쟁력이 약화되어 경제가 침체되는 현상을 말한다. 1959년 네덜란드가 북해에서 대규모 천연가스전을 발견한 후 겪었던 부작용에서 유래했다. 원자재 수출이 급증해 많은 달러가 유입되면 자국의 화폐가 가치가 빠르게 오른다. 이때문에 가격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공산품의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은 급증해 실업이 늘고, 경기가 침체되면서 불황으로 이어진다. 원유수출이 많은 중동과 남미, 특수광물 수출이 많은 아프리카의 주요국가들의 산업기반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것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구보는 황금광시대를 언급하며 저도 몰래 무거운 한숨 쉰다. 일확천금에 눈멀어 내부적으로 무너져내리고 있는 조선사회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리 없다.
식민지 청년들, 일자리가 없었다
아들이 월급자리라도 구할 생각 없이 밤낮으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혹은 공연스레 밤중에 나돌아 다니는 것이 어머니는 보기에 딱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동경에 건너가 공부까지 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해도 일자리가 없다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거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진짜로 그랬다. 일제에 부역하지 않으려 취직을 피하기도 했지만, 자립적 산업기반이 없어 좋은 일자리가 없기도 했다.

경성은 모던하게 발전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청년은 어디 갈 곳도, 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소설가 구보의 일일>이 한량들의 경성유람기로 읽히지 않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우울함과 좌절감, 무력감이 기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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