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39> 박하사탕] 허브 향을 머금은 대지로 돌아가다, 리콜라 허브 센터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2026. 6. 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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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하사탕' 속 장면. /사진 CGV 아트하우스

1999년 봄, 녹음이 서린 철교 아래 하천가 한편에서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가 한창이다. 무르익어가는 정겨운 분위기 속으로 정장 차림의 영호가 불쑥 나타난다. 오랜 동료의 뜻밖의 등장에 모두 반가워하지만, 여러 사연이 뒤엉킨 듯 피폐해진 그의 돌발 행동은 모임의 공기를 점차 어색하게 한다. 노래 반주와 엇박자로 ‘나 어떡해’를 목청껏 부르던 영호는 어느새 철교 위에 올라서 있다.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거칠게 다가온다. 동료는 위험하다며 소리치지만, 그는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절규하듯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는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이창동 감독의 2000년 작품, ‘박하사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의 끝과 시작을 잇는 것은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의 시선이다. 영화는 검은 화면 너머의 작은 빛 하나가 터널의 소실점을 따라 점점 가까워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흩날리던 꽃잎은 다시 가지에 달라붙고, 도로 위 자동차는 거꾸로 움직인다. 영화는 그렇게 1999년의 봄에서 출발해 시간을 역행하며, 마흔 살 영호의 과거를 천천히 더듬어 올라간다.

강현석 - SGHS 설계회사 소장, 미국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상실의 시대를 거치며 왜곡되는 개인

영화를 관통하는 시간 열차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시대에 차례로 정차한다. 1997년 외환 위기,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쳐 마침내 그 출발지이자 종착역인 1979년에 도달한다. 1979년의 가을은 스무 살 영호가 구로공단 야학 모임에서 첫사랑 순임과 야유회를 떠났던 시절이다. 그 장소는 영화의 시작점인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와 같은 하천가다. 영화는 같은 장소를 시간의 양 끝에 배치하며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순환 구조를 만든다. 이를 통해 시대와 개인의 관계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사유하게 한다.

영화는 사진을 좋아하던 순수한 청년 영호가 폭력과 상실의 시대를 지나며 서서히 훼손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순임과 만남 이후 군에 입대한 영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군으로 동원되고, 그곳에서 의도치 않게 여고생을 살해한다. 죄책감과 충격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틀어 놓는다. 제대 후 그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를 고문하는 폭력 경찰이 되고, 순임과 연락을 끊는다. 이후 불륜과 이혼, 외환 위기로 인한 파산까지 겪으며 삶은 끝없이 추락한다.

영호의 오염은 무엇보다 그의 손을 통해 상징된다. 순임은 영호의 손을 보고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들꽃을 꺾어 건네던 그의 손은 결국 민간인을 살해하고, 고문하며, 불륜의 욕망까지 끌어안는다. 영호는 끝내 순임을 잊지 못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오염된 손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순임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영화 속 시대 상황은 후진할 수 없는 열차처럼 개인을 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그 속에서 영호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순수함을 잃어가고, 되돌릴 수 없는 추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위) 리콜라 허브 센터. (아래) 리콜라 허브 센터 흙벽 시공 사진 /헤르조그 앤드 뫼롱

청량한 향이 환기하는 시간

박하사탕은 텁텁한 입맛을 잠시 청량함과 시원함으로 채운다. 폭력과 타락으로 얼룩진 영호의 삶에서 스무 살의 기억은 켜켜이 쌓인 시간을 잠시 휘발시키는 박하사탕처럼 남아 있다. 그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은 박하사탕의 하얀빛처럼 흠결 없는 순수함으로 채워진 세계이며, 그곳에는 첫사랑 순임이 있다. 영화 속 박하사탕은 끝내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감각적으로 환기한다.

2014년 스위스의 농업과 산업 풍경이 교차하는 라우펜 지역에 완공된 리콜라 허브 센터는 미각과 후각의 차원에서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리게 한다. 이 건축물은 사탕을 포함한 모든 허브 제품의 원재료를 가공하는 과정을 위해 구축된, 솔직하고 순수한 구조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접점은 다른 곳에 있다. 리콜라 허브 센터 역시 제품의 출발점인 허브 재배의 시간을 환기하고, 그곳의 흙이 지닌 물성을 건축 안으로 다시 호출한다.

리콜라 허브 센터 흙벽 공장 제작 사진. /헤르조그 앤드 뫼롱

허브 향과 호흡하는 흙덩어리

1930년에 설립된 리콜라는 라우펜에 본사를 두고 약 40종의 허브 제품을 생산한다. 원재료인 허브는 알프스 산악 지역에서 재배되며, 새롭게 완공된 허브 센터는 매년 약 150만㎏의 신선한 허브를 가공하고 저장한다. 들판을 배경으로 길게 뻗은 높이 11m, 길이 111m의 박스 형태는 세척과 건조, 절단과 혼합, 저장에 이르는 선형적인 가공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장방형의 대공간은 각 공정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짙은 허브 향으로 가득 찬다.

설계를 맡은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은 콘크리트 기둥 구조 바깥을 독립적인 흙벽으로 감싸며 ‘풍경이 건축이 되는 풍경’을 구현하고자 했다. 건물에 사용된 재료는 대부분 현장 굴착 과정에서 나온 흙을 포함해 최대 반경 10㎞ 이내에서 채취한 모래와 점토, 자갈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거대한 벽체는 공장에서 너비 4.35m, 높이 1.35m 크기의 다짐 흙 패널 666개로 미리 제작된 뒤, 현장에서 장대석처럼 층층이 쌓아 올려졌다. 거대한 원형 창이 두꺼운 흙벽을 깊숙이 관통하며 내부 공간으로 빛을 끌어들이고, 짧게 돌출된 얇은 금속 지붕은 거대한 흙벽의 육중한 질감을 더 강조한다.

흙벽 제작 과정 역시 내부의 허브 가공처럼 혼합과 압축, 반복의 노동 위에서 이루어진다. 점토질 흙과 이회토, 골재를 혼합한 재료를 거푸집에 넣고 일정 높이마다 단단하게 다져 올리면, 벽 표면에는 지층처럼 수평의 선이 켜켜이 새겨진다. 이 층위는 단지 시공의 흔적이 아니라 시간과 과정의 흔적이기도 하다. 또한 바람과 비에 의한 침식을 막기 위해 응회암과 석회를 섞은 모르타르를 흙층 8단마다 함께 다져 넣으면서, 황토색 층 사이로 얇은 회색 띠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점토질 흙의 가소성 덕분에 패널 사이의 이음매는 매끄럽게 수정되며, 그 결과 건물은 하나의 거대한 흙덩어리처럼 균질한 외관이 된다. 결국 흙에서 자라난 허브는 다시 흙으로 만든 공간에서 가공된다. 건축은 생산 시설을 넘어 대지의 기억을 순환시키는 장치가 된다.

여기에서 흙벽은 단지 감각적이고 감상적인 장치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두께 45㎝의 흙이 지닌 열 질량과 다공성은 허브 가공과 저장에 요구되는 습도와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벽체는 호흡하듯 겨울에는 열을 저장하고, 여름에는 그것을 점진적으로 방출하면서 실내 온도의 급격한 변화를 막고 습도를 조절한다. 우리는 영화 속 영호처럼 각자 돌아가고 싶은 인생의 박하사탕을 품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리움과 후회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그 시간의 감각을 지금의 삶 속에서 다시 호흡하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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