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이런 군인들은 없었다... 나라를 지킨 무명용사들 [호준석의 역사전쟁]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2026. 6. 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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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자유 대한민국이 멸망 위기에 처했을 때 전선 곳곳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부 수립 2년도 안 된 신생 국가, 제대로 처우도 받지 못하던 가난한 군대, 겨우 스무 살을 넘은 그 청춘들이 뒤로 숨거나 도망쳤다면 오늘의 발전된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군사 전문가가 ‘역사상 이런 군인은 없었다.’고 감탄하는 대한민국의 무명용사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25 남침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서부 전선의 인민군 1사단은 문산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낮 12시쯤 인민군은 전차 18대를 앞세우고 봉암리 쪽에서 위전리 쪽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적 전차가 나타났다”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문산천에 전개한 적 전차 18대의 집중 사격에 아군 진지는 삽시간에 파괴됐습니다. 국군은 인민군 전차 사격 소리를 ‘땅퐁’이라고 불렀습니다. ‘땅’ 하는 발사음과 함께 목표물에 맞는 소리가 ‘퐁’ 해서였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장병들은 회고했습니다. 적 전차는 기관총을 휘두르며 15연대 진지까지 돌진해 왔습니다. 국군의 57㎜ 대전차포도, 2.36인치 로켓포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연대가 초토화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15연대 3대대장 최병순 소령이 육탄 공격조를 편성해 적 전차에 돌격한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갑자기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둔전동 쪽에서 울려 퍼지며 70여 장병이 전차를 향해 일제히 돌진하는 장렬한 광경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어쩌자고 맨몸으로 철갑 탱크 앞으로 달려드는가!” 하는 괴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적은 예상치 못한 돌격에 단말마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몸부림쳤으나 때가 늦었다. 일부 병사들은 이미 전차에 기어 올라가 포탑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넣었고, 어떤 병사들은 포탑이 열리지 않자 길게 뻗은 포구에 수류탄을 넣으려고 포신에 동동 매달리고 있었다. 어떤 병사는 전차의 취약점인 눈(잠망경)을 막아버리기 위해 진흙을 준비했다가 적 전차에 뛰어올라 잠망경에 진흙을 문질러 버렸고 적의 전차는 방향을 잃고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병사들이 벌떼같이 적의 전차에 오르자 북괴군 전차병들은 포탑을 급선회시켜 일부 병사들은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호 속에 있던 어떤 병사는 적의 전차가 호를 깔아뭉개고 통과하자 뛰어나가 전차 후면에 수류탄 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 사이에 연락장교 마 중위(이름 미상)가 105밀리 곡사포를 혈전장으로 유도하여 마치 직사포 식으로 적의 전차를 직접 사격함으로써 1, 2대의 전차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같은 육탄 공격으로 북괴군은 도합 8대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화염에 휩싸이자 나머지는 문산천을 향해 도주해 버렸다. 실로 김선일 대위, 전일수 소위, 김종록 이등상사를 비롯한 40여 명의 고귀한 희생자를 내고 얻은 값진 대가였다.” (당시 1사단 15연대장 최영희 저 <전쟁의 현장>)

같은 날 아침 8시. 포천에서는 인민군이 자일리 쪽에서 금오리 쪽으로 장사진을 이루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육군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포 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이 근접하자 105㎜ 곡사포로 1번 전차만 집중 포격했습니다. 그러나 전차 대열은 꿈쩍도 않고 진격해 왔습니다. 김 소령은 장병들에게 말했습니다. “모두 진정해라. 보병 부대는 후퇴하고 있지만 우리는 끝까지 여기 남아 적의 전차와 대결할 것이다.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 것은 보병이 아니라 바로 우리 포병의 임무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김 소령과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는 자일리 서남쪽 1㎞ 도로상에 2포대의 6번포를 방열하고 대기했습니다. 9시 10분쯤 적의 선두 전차가 50m 전방까지 다가오자 제1탄이 발사됐습니다. 포탄은 선두 전차의 궤도에 명중했습니다. 대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궤도가 파손된 적 전차는 맥없이 길옆으로 미끄러졌습니다. 6포반 대원들은 지체 없이 다음 전차를 향해 제2탄을 장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적 전차가 포신을 돌려 사격해 왔습니다. 김풍익 대대장과 장세풍 대위, 그리고 6포반원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러나 1번 전차가 파괴된 적군이 진로가 막혀 머뭇거리는 사이 아군 포병 대대는 전 화력을 집중했고 인민군은 위협을 느끼고 축석령 북쪽으로 퇴각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국군 운전병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은 모두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포를 더듬으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박윤식 저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인민군의 전차와 자주포를 멈추게 할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국군 초급 지휘관 중에는 필사적 육탄 공격으로 적을 막다가 산화(散華)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공대를 조직해 박격포탄, 수류탄, 화염병으로 전차를 공격했습니다. 목숨을 건 특공대에 소위, 중위들이 앞다퉈 자원했습니다. 주먹밥이 떨어져 3일씩 굶어가며, 내리는 빗물을 철모와 반합에 받아 마시며 싸웠습니다. 탱크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총탄에 맞아 품고 가던 수류탄 다발이 폭발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으로 국군은 방어선을 다시 구축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들이 몸으로 치러낸 전투는 희생적, 결사적이었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장병들의 기개는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개울가에 어떤 병사 두 사람이 복부에 파편을 맞았는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자기들은 제1연대 소속 아무 아무개인데 이제 여기서 죽게 되었으니 뒤에라도 자기 부대를 만나거든 그들이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전해 달라고 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달리 사람을 구할 길이 없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곳을 떠났는데 그들은 서로가 얼싸안고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네’하고 위로하면서 군가를 불렀다. 그 군가소리가 지금까지 내 귀에 쟁쟁하다.” (박원근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I>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특히 8.15 해방 후 김일성 정권과 소련군의 폭정을 몸으로 겪은 뒤 월남한 북한 출신 청년들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동부전선을 지키던 8사단 18야전포병대대도 90%가 월남한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6월 26일 밤 11시쯤 18포병대대는 관측장교 김용운 소위의 지휘 아래 사정거리에 들어온 적에게 무차별 포탄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일렬종대로 내려오던 인민군은 주문진 남쪽 양지말 일대에서 포격을 받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국군 기동부대는 연곡천 일대를 주저항선으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연곡,사천지구전투’)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음날인 27일 인민군은 다시 강릉으로 진격해 왔습니다.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됐습니다. 적군이 18포병대대 진지까지 밀어닥쳤지만 18포병대대는 철수하는 보병을 엄호하면서 3개 포대 15문의 포로 쉬지 않고 포격을 가했습니다. 퇴로 차단을 우려한 이성가 8사단장이 포병 철수를 명령했지만 이들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북진해서 하루 빨리 고향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던 장병들은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는 이제 도망갈 곳이 없다. 적을 죽이고 나도 죽자”는 구호를 외치며 5시간이나 혈전을 벌였습니다. 포대를 지휘했던 김용운 소위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적의 포격이 얼마나 치열하였던지 포의 폐쇄기를 잡은 병사의 몸뚱이가 포탄에 날아가고 끊어진 손목만 남으면 다른 병사가 살점이 엉겨 붙은 손목을 떼어내고 사격을 계속했습니다. 적이 포진지까지 밀어닥치자 야전삽, 곡괭이 등을 닥치는 대로 잡고 때려 부쉈으며, 저는 파편상을 입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머리로 받아 넘기며 육박전을 벌였습니다. 이때의 전투는 어느 나라, 어느 전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용감무쌍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전쟁사(1)>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77)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국군 장병들의 충성심과 용기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맥아더는 북한의 남침 다음날인 6월 26일 한국에 투입될 미군의 작전지휘관을 부여받은 뒤 29일 한강 방어선을 직접 시찰했습니다. 그가 확인하고 싶어 한 것은 한국군의 전투의지였습니다. 인민군은 한강 남쪽에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미 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이 전선 시찰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맥아더는 계속 차를 몰게 했습니다. 노량진에서 흑석동 사이 고지로 추정되는 ‘가’ 고지까지 올라가 쌍안경으로 전선을 살펴보던 칠순의 맥아더 원수가 갑자기 참호 속에 있던 국군 일등중사(현재의 하사)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셈인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군 소위를 지낸 김종갑 대령이 통역을 했습니다. 일등중사는 부동자세로 답했습니다.

“네,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중대장으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장하다.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다. 다른 병사들도 같은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지금 소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도와주십시오. 그것뿐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알았네. 내가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군.”

맥아더 원수는 일등중사의 흙 묻은 손을 꼭 잡아준 뒤 김종갑 대령에게 말했습니다.

“이 씩씩한 용사에게 전해 주시오. 내가 동경에 돌아가는 즉시 미군의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그리고 그동안 용기를 갖고 싸워 주기 바란다고” (정일권 <전쟁과 휴전> 동아일보사,1986)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6년 되는 해입니다. 이 영상이 공개되는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무명용사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법치를 반드시 지켜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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