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듯 몽롱한, 사티의 ‘제국의 디바’를 들으며 [.txt]

한겨레 2026. 6. 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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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모의 미락(美樂)클] 에리크 사티, 제국의 디바
‘괴짜’로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에리크 사티(1866~1925). 위키미디어 코먼스

노동자·예술가 푹 빠진 술 ‘압생트’
에리크 사티 음악에도 취기 가득
음표가 저절로 오선보를 채웠나

얼마 전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배우가 미국 유명 토크쇼에 출연해 ‘코리아’의 폭탄주를 직접 제조해 진행자와 함께 마시는 모습이 방송되었어요. 작은 소주잔을 맥주잔에 퐁당 빠뜨리는 퍼포먼스에 방청객들이 환호하더라고요. 소주의 정체를 묘하게 감추는 이 폭탄주 제조 퍼포먼스는 훗날 20세기 한국 인류사를 장식한 음료로 기록될지 모르겠네요.

술에 술을 섞는다는 건, 술을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겠죠. 너무 사랑하니까 이렇게 저렇게 마셔본 것. 예술가들이 특히 사랑한 술이 있어요. 슈베르트가 애음한 맥주도 아니고, 베토벤이 좋아한 와인도 아닌 ‘초록 요정’이라 불린 압생트랍니다. 압생트에 푹 빠졌던 예술가라면, 고흐, 로트레크, 피카소, 모파상, 랭보, 오스카 와일드와 헤밍웨이, 에리크 사티가 있어요.

압생트에 푹 빠진 헤밍웨이는 압생트를 샴페인에 녹여 마셨고, 몽마르트르의 작은 거인이라 불린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코냑에 압생트를 섞어 마셨어요. 화가의 입술에 닿은 압생트 한 방울이, 그대로 붓을 타고 캔버스 위에서 춤을 추지 않겠어요? 몸이 악기인 연주자는 무대에 서야 하니, 술은커녕 주로 커피를 흡입해요. 어서 각성하고 연습에 불을 붙여야 하거든요.

19세기 말 파리에는 2만7천개의 카페가 있었답니다. 파리에는 카페 외에도 밤마다 각종 공연이 펼쳐지는 카바레, 그리고 카페와 카바레가 합쳐진 카페 콩세르(Cafe- concert, 일명 디너쇼)가 있었어요. 현실을 잠시 잊고 술에 기대 유흥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였지요. 드가가 그린, 압생트에 가득 취해 넋이 나간 여성을 보고 있노라니,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서 한잔한 걸까요? 소시민들은 고단한 삶을 잊게 하는 강력한 마취제이자, 팍팍한 도시 노동자의 삶을 달래준 압생트의 환각적이고 몽롱한 느낌에 중독됩니다.

보헤미안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화가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와 사창가 주변 어딘가에 존재했어요. 압생트는 너무 독해서 설탕을 퐁당 떨어뜨려 녹여 마시기도 하는데요, 로트레크는 압생트에 코냑을 섞었으니, 진정한 술꾼이죠. 로트레크는 하반신 장애의 고통을 잊고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 압생트를 마셨어요. 그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요. 그 기다란 지팡이는 실은 술병이었어요. 압생트가 항상 그득 채워져 있었죠.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가 보내준 돈으로 압생트를 즐겨 마셨어요. 고흐의 압생트 그림을 보면 초록 술병 옆에 물병이 있는데요. 약 45도에서 70도로 매우 독하다 보니, 꼭 물과 함께 마셨나 봅니다. 고흐는 ‘몸에 들어온 압생트를 그림 위에 쏟아 낸다’고 표현했어요. 그는 창작의 압박과 우울증,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압생트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생명에 부담이 되었죠.

고흐와 로트레크 모두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어요, 로트레크는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하다가 36살에, 고흐는 37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술꾼들’(1890). 시카고미술관 소장

압생트로 건강에 무리가 온 음악가도 있어요. 괴짜 중의 괴짜인 에리크 사티는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압생트를 끼고 살다가 과도한 음주로 58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간경화였어요.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티는 로트레크의 애인이었던 쉬잔 발라동을 보고 첫눈에 반해요. 잠깐의 연애 후, 평생 그녀를 잊지 못했고 압생트를 물처럼 마시며 그리움을 달랬던 듯해요.

“나는 내가 압생트를 마시는 것을 모르고, 압생트를 마시는 것 또한 모른다.”

사티는 ‘에리크 사티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알쏭달쏭하죠? 어쨌든 사티가 압생트를 마시며 쓴 건 확실해요. 술과 관련된 많은 음악이 있죠. 축배의 노래, 바카날(술의 노래), 권주가 등. 제목에 술이 들어간 음악은 그저 취한 정도의 느낌이지만, 환각이 시작될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티의 음악을 들어보시면, 완전히 이성을 잃고, 현실을 벗어나 작곡한 듯한 느낌을 받게 돼요. 압생트의 환각에 빠져 음표가 저절로 걸어 나와 오선보를 채운 듯하지요. 술을 전혀 안 마셔도 본능을 그대로 담은 듯한 사티의 음악을 들으면 몽롱한 환각 상태로 끌려가고야 마는데요. 맨정신에 들어보시고, 몇잔 마신 듯한 기분이 드신다면, 사티가 압생트에 취한 보람이 있는 거네요.

지금 마시는 커피에 압생트 한 방울이라도 떨궜다면 좀 더 멋진 글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사티가 몸담았던 카바레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곡을 소개합니다. 사티가 1904년에 작곡한 ‘제국의 디바’는 본래 피아노곡인데요, 가사를 붙여 카바레의 인기 여가수인 폴레트 다르티가 노래하고, 사티가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사티는 미국의 재즈를 누구보다도 빨리 영입한 매우 영민한 작곡가로, 재즈의 시작이 된 래그타임을 부점 선율에 입혔어요.

당시 영국 엠파이어 극장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고급 매춘부들은 ‘제국(엠파이어)의 딸(디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청순한 소녀처럼 옷을 입은 디바는 ‘예스(Yes)!’라고 말하고는 수줍게 치마를 들어 올리네. 신사들은 잔뜩 반해 무대 위로 꽃다발을 던지네” 가사가 의미심장하죠?

이 곡은 씩씩한 행진곡풍에 음란하면서도 속물적인 가사로 프랑스 전역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리지만, 돈은 카바레 주인과 노래의 독점권을 가진 가수 다르티가 다 벌었어요. 사티는 죽을 때까지 ‘가난뱅이씨’였어요.

압생트의 성분인 투존이 환각을 유발함에 따라 1910년대에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생산을 금지해요. 다행히(?) 소량의 투존은 안전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2007년부터 재생산되고 있어 (다행히) 구입이 가능하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제국의 디바’를 들으며 압생트를 장바구니에 담고 계신다면, 소주와도 섞어서 드셔보세요. 건강 검진(병원 예약)은 필수입니다.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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