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왜 보수의 성지인가, 이 사건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대구의 보수 정체성 다룬 논문 전남대 5·18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게재… "국가가 미군정 10·1 사건 재조사 통해 전말 규명하고 공식 사과와 배상 나서야"
[미디어오늘 박서연 기자]

대구가 보수의 아성이라는 사실은 6·3 지방선거에서 다시 증명됐다. 대구가 과거부터 보수 정체성을 형성하며 '보수의 성지'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구에서도 해방 이후 1946년 10월1일 민중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민중운동에 나선 대구 시민들은 국가에 의해 폭력과 죽임을 겪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73개 시군 지역으로까지 운동이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미군정이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사람들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대구영남 지역은 이후 '살아남기 위해' 급진적 변화를 경계하고 체제 순응을 학습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12월 전남대 5·18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민주주의와 인권'호에 실린 <남북 분단과 대구의 보수 정체성 형성의 상관관계 연구> 제목의 논문에서 대구에서 일어난 △미군정 치하인 1946년 10·1 사건 △1970년대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등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논문은 특히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가 미군정 10·1 사건 재조사를 통해 전말을 규명하고, 공식 사과와 법제도적 배상에 나설 필요성이 제기된다”라고 강조했다.

논문은 대구가 보수화된 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46년 대구 10·1 사건'이라고 했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1945년 해방 이후 민중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미군정은 통치의 연속성을 위해 식민지 관료 경찰 체계 상당 부분을 재활용했고, 시민들은 좌절을 체감했다. 여기에 식량난과 물가 폭등이 겹치면서 도시 빈민과 노동자의 생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 공백의 시기에 대구에서는 좌익은 친일 청산, 토지 개혁, 식량 배급처럼 민생을 건드리는 의제를 내세워 노동자 농민의 호응을 얻었다. 반면 우익은 질서, 사유재산, 반공을 앞세워 미군정과 손을 잡았다. 전국적 물가 상승과 식량난, 공출과 통제 정책은 오히려 암시장과 가격 폭등을 낳았고, 대구의 실업과 결핍은 깊어졌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을 빼놓고 대구를 말할 수 없다
결국 좌우 갈등의 누적은 1946년 가을 임계점을 넘어섰다. 1946년 9월 철도노조 총파업으로 긴장이 고조된 뒤, 10월1일 파업 지지 시위를 강제로 해산하려던 경찰의 발포 소식이 번개처럼 퍼졌다. 분노는 순식간에 도시 전역으로 확산했고, 경찰서 습격과 공공기관 방화 같은 격렬한 항쟁이 이어졌다. 봉기의 중심에는 철도 노동자, 도시 빈민, 학생 등 사회적 약자가 있었다. 표면은 경찰과의 충돌이었지만 이면에는 미군정 실정, 식민 잔재, 좌우 이념 대립이 겹겹이 쌓인 생존권의 절규가 있었다.


6년 전 KBS대구방송총국이 제작한 <[기억 마주서다] 시월, 봉인된 시간>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강창덕(92) 당시 경북도청 농업경제과 직원은 “해방됐다고 모두 환희를 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고 했는데. 강제 공출 때문에 그래요. 강제 공출하라는 부분에 가장 불만이 컸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포승줄에 묶여가는 우리 낭군, 군정 재판받더라도 강제 공출 반대 하이소”라는 가사의 노래가 당시 농촌에 퍼져있었다고 설명했다.
김준규(92) 당시 계성중 학생도 다큐멘터리에서 “일어날 게 일어났다고 봤다. 항쟁이라고 할까. 아마 국민이 어지간히 참고 터졌다고 난 봤다. 대구경찰서를 습격하러 가야겠다고 교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그 당시에 벌써 시내 교문 밖에 나가니까”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상숙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은 “거기에 시민들이 합세를 해서 지금의 중부경찰서 사거리에 만 오천 명 이상의 시민들이 집결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틀 동안 집계된 사망자만 24명이었다고 한다. 강창덕씨는 “데모 행진 소리가 들려서 그쪽을 보고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위대가 지나가더라. 시체를 들것에 담아서 경찰은 무장 해제를 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서 절규하다시피 하면서 지나가는 걸 목격을 했다”라고 말했다.
폭동의 죄로 수감생활을 했던 故(고) 배동발씨의 아들이자 당시 대륜중 학생이던 배일천씨(88)는 다큐멘터리에 “한 경찰이 여기까지 내려와서 공포탄을 쏘니까 여기 있던 박치도라는 사람이 방 안에 있었으면 괜찮은데 자기 '잡으러 왔는가 보다' 싶어서 도망쳤던 거예요. 도망가는 사람을 경찰이 사살해버렸어요. 그걸 내 눈으로 명백히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이웃 주민은 빨갱이 자식이라고 아무도 대화도 안 하지요. 거기서 외톨이로 살 수가 없고 갈 데도 올 데도 없고 집도 없고”라고 덧붙였다.

시위는 73개의 시군으로 번져 그해 12월까지 계속됐다. “돌아가셨다고 생각 안 하고 늘 행방 불명자로 생각하고 명절 되면 두루마기 다려서 옷걸이에 걸어놓고 밥은 매일 떠가지고 아랫목에 묻어놓고 자식하고 가난만 물려받아서 빨갱이 아낙으로서 평생을 사는데 어떻겠습니까. 모두 가슴에 응어리가 져서 어딜 가든지 기를 못 펴고 산다. 그래서 잘 웃을 줄도 모른다. 엄마로부터 한숨과 피눈물 나는 이야기만 들었으니까. 웃고, 행복하다 이런 단어는 잘 모르고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 아버지 소문이 날까, 손님들한테도 혹시 빨갱이로 낙인찍힐까.” 10월 항쟁 유족회의 채영희(74)씨 말이다.
“우리가 70년 동안 가슴 응어리지도록 아버지를 찾는 그 마음을 너희가 아느냐고. 아버지는 논에 가서 김매고 집에 들어와서 자는데 자는 사람 깨워서 데려갔다. 그길로 데려가서 죽였는지. 살렸는지 안 돌아옵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요. 이때까지.” 10월 항쟁 유족회의 김수헌씨(71)씨 말이다.
미군정, '1946년 대구 10·1 사건' 반미·반정부 폭동으로 규정
그러나 미군정은 사태를 반미반정부 폭동으로 규정했고, 미군 헌병과 남조선국방경비대, 경찰을 총동원해 실탄까지 사용하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공식 집계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추정되는 사망부상과 대규모 검거가 뒤따랐고, 대구는 통금과 집회 금지, 가택수색 속에 얼어붙었다. 민생 문제에 대한 정책적 대응은 실종되었고 사건은 이념 프레임 속에서만 해석되었다. 시민이 체감한 것은 국가 폭력의 실체, 그리고 '정치에 얽히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차가운 학습이었다.
논문은 “사건 이후 지역의 심리 지도는 급격히 바뀌었다. 좌익은 민생의 대안에서 혼란과 폭력의 상징으로 낙인찍혔고, 반공 정서는 빠르게 확산됐다. 무질서의 기억은 질서와 안정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끌어올렸으며, 급진적 변혁보다는 체제 내 점진적 개선을 선호하는 태도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다. 대구 사회는 정치적 발언과 집단행동을 위험한 일탈로 보는 경향을 강화했고, 삶의 기반을 지키는 현실주의가 일상적 상식으로 굳어졌다”라고 설명했다.
“대구는 해방 직후 미군정기의 혼란, 1946년 10·1 사건, 좌우 이념 대립의 폭발 속에서 무질서와 불안정을 직접 경험하였다. 이는 곧 '질서안정연대'라는 가치가 시민들의 삶의 중심 코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을 거치며 반공은 곧 생존의 이념으로 내면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정치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대신 보수 정치에 대한 강한 집단적 충성을 낳았다. 더불어 종교와 교육, 지역 언론은 보수 정체성을 강화하는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교회와 청년단은 반공을 공동체 윤리로 내세웠고, 교육은 권위와 질서를 강조했으며, 지역 언론은 정치적 감수성을 제한하며 보수 담론을 재생산했다.”
논문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대구의 정치문화는 변화를 위험으로 간주하고 점진적 개선과 안정적 질서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고착되었다”며 “그 결과 대구는 오랜 기간 특정 정당과 동일시되며 '보수의 성지'로 불리게 되었다. 현대적 용어로서 '보수' 정체성은 광복 이후 미군정의 10·1 사건을 계기로 점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대구의 정체성은 남북 분단과 6·25전쟁 등을 겪으며 공고화되었고, 인혁당 사건 등을 통해 더욱 강화증폭되는 수순을 밟는다”라고 했다.
“'대구 10·1 사건' 재조사 통해 전말 규명하고 트라우마 치유해야”
끝으로 국가가 나서 대구에서 일어난 미군정 10·1 사건 재조사를 통해 전말을 규명하고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논문은 “현재 대구는 정치적 실험과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지역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성숙과 다양성을 시험할 중요한 계기이며, 대구가 앞으로 한국 정치의 새로운 실험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실험이 의미 있게 전개되려면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규정 및 처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가 미군정 10·1 사건 재조사를 통해 전말을 규명하고, 공식 사과와 법제도적 배상에 나설 필요성이 제기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역사회는 교육과 전시, 아카이브, 기념 공간을 통해 침묵의 역사를 공공의 기억으로 복원해야 한다. 이는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시험이다. 앞으로 대구의 보수 정체성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 활성화 및 문화 이식 등을 시도함으로써 한 걸음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인혁당 사건 등 과거 잘못된 판단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 명예회복, 공적 기억과 책임 의식의 복원 등에 나설 때 비로소 과거 공포가 만든 침묵의 굴레를 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집단적 트라우마의 해소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해당 논문을 작성한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는 미디어오늘에 “오늘날 대구는 기득권의 도시, 보수의 심장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대구는 보수의 심장이기 이전에 '항거'의 도시이기도 했다”라며 “미군정 치하인 1946년 10·1 사건, 1970년대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등이 모두 대구·경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저항의 사건들”이라고 했다.
김수한 기자는 이어 “영남을 연고로 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러한 항거의 역사가 철저히 부정되고 잊혀지게 되자, 살아남은 사람들 대다수는 생존을 위해 극단적 보수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대구의 과거를 재평가하고, 기념할 것은 기념하고 추모할 것은 추모하는 것이 대구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논문은 <대구는 왜 보수의 성지가 되었나?>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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