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의 커피는 어떻게 정치가 되었나 [남인숙의 신중년이 온다]

남인숙 작가 2026. 6. 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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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음’의 해방구였던 스타벅스, ‘탱크데이’ 파문으로 논쟁 휩싸여
부적절한 마케팅이 부른 후폭풍…개인 소비취향과 공동체적 평가의 충돌

(시사저널=남인숙 작가)

2000년대 초중반은 필자가 평생을 통틀어 가장 가혹하게 일한 시기였다. 책을 쓰는 일이 본업이었던 탓에 대개 혼자 작업을 했다. 지금보다 글밥이 많고 논지가 깊어야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었던 시기라 매번 탈고는 고통스러웠다. 기획과 자료 수집을 끝내고 몇 달간은 사람들과 약속도 잡지 않고  작업실이나 집에 틀어박혀 종일 키보드를 두드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이러다 내가 고장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노트북 컴퓨터를 싸들고 집 근처 대학가 스타벅스로 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붐비지 않는 늦은 오전에 나가 노트북 배터리가 소진되면 돌아오곤 했다. 아직 카페에서 공부나 일을 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시기라 주변 사람들은 그 시끄러운 데서 어떻게 일을 하냐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교류하지 않아도 되는 타인 사이에서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사회적 욕구를 충족받으며 홀로 일할 수 있는 그곳은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 구원의 장소였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오히려 집중을 돕는 백색 소음이었고, 어쩌다 주변의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날은 어차피 집중이 안 되는 날이라는 신호이기 때문에 얼마간 스크린을 노려보다 짐을 싸면 되는 일이었다. 

5월27일 서울 스타벅스 광화문점 앞을 시민들이 다른 브랜드 커피를 들고 지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스벅 한국 입성과 개인 공간의 자기 시간, 궤를 같이해

하루 많은 시간을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혼자라는 건 고립이나 무능을 의미했다. 그런 시기에, 원할 때 얼마든지 혼자 있을 수 있으면서도 친절한 직원들과 소통하는 찰나에는 따뜻한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생겼다는 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 비싼 걸 팔면서도 커피를 자리로 가져다주지도 않는다는 것이 못마땅했던 첫인상은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희석되었다.

돌아보면 스타벅스가 한국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기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개인으로서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나는 혼자 사는 여자가 좋더라"라는 남성들의 농담이 공공연하게 들려올 정도로 1인 가구 여성에 대해 편견이 있고, 남녀 불문 누구나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사람의 가치는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로 매겨졌다. 

1999년,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한국에 들어온 스타벅스는 단순히 비싼 커피를 파는 장소가 아니라 개인이 멋진 공간에서 홀로 머물 수 있는 삶의 장면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그 전까지 카페는 타인과 대화를 하거나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는 공간이었다. 용건 없이 혼자 커피만 마시다 가는 건 꽤나 눈길을 끄는 일이었다. 

당시 젊은 여성이 혼자 앉아 책을 읽거나 일을 해도 눈총을 받지 않고 도리어 '쿨하게' 보이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다른 소비층에게 무의식적인 위기감을 주기도 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국가 복지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던 한국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이 혼자 머무르며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건 결코 반가운 신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용어가 바로 '된장녀'였다. 된장녀란 아직도 종종 쓰이는 신조어로, 경제력은 충분하지 않으면서 스타벅스 같은 소비로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여성을 조롱하는 말이다.

필자가 쓴 20대 여성 대상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시기와 된장녀 논란이 불거진 시점이 겹치면서 당시 수많은 언론사 기자들에게서 관련 코멘트를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스타벅스에 생업을 빚진 입장에서 또 독립적인 자아를 독려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거기 드나드는 여자들이 허영에 절여진 유해한 집단이라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지나고 보니 필자가 스타벅스에서 개최한 북토크 행사의 첫 주인공으로 초대된 일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스타벅스에서 공간을 소비하는 방식은 이후 사람들이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과 맞물려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가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카페에서 혼자 공부를 하거나 노트북을 펴고 일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 카페 체인은 콘센트를 자리마다 설치하고 독서실 콘셉트의 공간을 만드는 등 체류를 장려하기도 한다. 스타벅스가 우리에게 개인으로 존재하는 맛을 알게 한 것인지, 개인을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에 스타벅스가 판을 깔아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에서 자기 가치를 찾던 사람들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식과 자유를 느낄 줄 알게 된 전환의 배경에 스타벅스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명확하다. 

'위무의 공간' 스벅이 자초한 위기 씁쓸

이처럼 한국에서 개인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 스타벅스가 최근 가장 개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논쟁에 휩싸이고 있다. 5월18일 이벤트의 '탱크 데이'라는 작명과 적절하지 않은 서브카피까지 내걸면서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립선의 중심에 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다. 커피를 소비하는 장소도 철저하게 취향을 담는다. 논란이 일어도 다른 선택권이 없는 생필품이나 인프라 관련 기업들과는 다르다. 취향을 담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비에서는 물성 그 자체보다 경험이 중요하다. 그것을 소비할 때 '기분'의 지분이 크다는 의미다. 그동안 스타벅스와 관련된 잡음이나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일부 불만에 그쳤던 건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개인에 대한 침범은 없어서였다. 

근래 스타벅스를 드나드는 것은 개인이 어떤 공동체적 가치를 평가받는 일이 되었다. 소비를 거부하거나 적극적으로 소비하려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슈에 관심 없는 사람들조차 그 공간 안에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해 공동체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모든 동의와 비동의를 초월해, 기호의 영역에 집단 가치가 침범하는 건 세련된 일이 아니다. 

애초 된장녀라는 멸칭을 들으면서도 스타벅스에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초기 소비자들은 오롯이 개인으로서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매료되는 경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바다에서 사람을 홀리는 요마(妖魔)인 세이렌을 형상화한 스타벅스 로고는 개인화된 경험을 압축한 상징이었다. 한때 그 로고가 박힌 텀블러나 가방이 오픈런을 해서 사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필자는 집에서 작업하며 직접 원두커피를 갈아 드립해 마시고 있다. 이제 탈고 기간에도 외부 일정을 잡고 사람을 만나는 등 균형을 잡으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하지만 글 쓰는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유난스러운 개인으로서, 오랜 시간 위무의 공간으로 삼았던 스타벅스가 짐작도 못 했던 방식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 

남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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