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국경 넘는 철도…'아세안 솅겐'의 꿈[동남아시아 TODAY]
[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

쿠알라룸푸르발 기차를 타고 싱가포르를 향해
어릴 적 읽은 '80일간의 세계일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기차 여행에 대한 낭만과 신비함을 심어줬다. 그래서인지 선택의 여지가 있으면 버스나 비행기보다는 기차를 고르는 편이다. 말레이시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도 가장 먼저 한 것이 싱가포르행 기차표를 끊은 것이었다. 사실 그 안에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초국경 인프라를 공부하고 있어 쿠알라룸푸르에서 중국의 쿤밍에 이르는 길을 기차로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넉넉히 1주일 이상은 걸릴 것이라는 말레이시아 친구의 충고에 일정을 생각해 급히 계획을 수정했다.
초국경 인프라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 기차 여행을 기대한 것은 유럽에서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를 오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고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라는 지역통합체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기차 여행을 결정한 진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육로가 막혀 있어 섬나라와 같은 한국에서는 하지 못하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생생한 경험은 연구자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충분한 이유가 됐다.
같은 기대를 품고 말레이시아발 기차에 올랐으나, 생각과는 달리 기차여행 중 몇 번의 멈춤이 있었다. 우선 여정의 중간쯤 '게마스'(Gemas)역에서 내려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복선 구간 완공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차를 갈아타고 싱가포르와 접한 조호르바루에 도착해서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국경에서 각각 출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다시 멈춰야 했다. 아세안은 하나의 지역공동체이지만 국경은 여전히 서로를 가르고 있다는 사실이 사뭇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도 잠시 멈춤이 있지만 막혀있지 않다는 점에서 내 기대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다.
아세안 연계성(ASEAN Connectivity)을 위한 철도 연결망 구상

아세안 지역에서 철도를 통한 연결의 꿈은 1995년 제5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시작됐다. 이 회의에서 당시 의장국이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 주도로 싱가포르에서 중국 쿤밍을 철도로 연결하자는 구상인 SKRL(Singapore-Kunming Rail Link)이 채택됐다. 이후 수십 년간 ASEAN 연계성의 핵심 축이었던 이 구상은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잇는 총연장 약 6600㎞에 달하는 지도상의 선으로만 존재했으며, 곳곳이 단절 구간(missing link)으로 남아있었다.
연결이 본격화된 것은 2021년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과 중국 쿤밍 구간을 잇는 총연장 414㎞의 고속철이 개통하면서부터다. 이 구간을 시작으로 기존 동부와 서부 2개 루트 이외에 중앙 루트를 추가해 3개 노선을 구상한 '범아시아 철도 네트워크'(The Pan-Asia Railway Network)가 본격 궤도에 올랐다. 라오스는 이 구간을 소위 '철의 강'(Iron River)으로 부르며 내륙에 갇혀 있던(landlocked) 국가에서 육상을 연결하는(land-linked) 국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2024년에는 태국 방콕과 라오스 비엔티안을 잇는 국경 간 직통 여객 서비스도 시작되면서 지도상으로만 존재했던 노선이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메가 프로젝트로서 이정표가 될 동해안철도(ECRL·East Coast Rail Link)가 2027년 개통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개발이 잘 이뤄지지 않았던 말레이시아 동부 내륙을 발전된 서부 지역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노선이다. 태국과 접한 코타 바루에서 서부 해안 항구도시인 포트 클랑까지 이어지는 노선은 이후 태국과 연결되면 라오스를 거쳐 중국으로 이어져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하나의 중요 물류 노선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철도 연결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세안은 2025년 '아세안 연계성 전략계획'(ACSP·ASEAN Connectivity Strategic Plan)을 채택하며 역내 통합을 위해 '연계성'을 네 번째 축으로 격상시켰다. 물리적, 제도적, 인적 연계성을 강화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철도는 연계를 위한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연계와 단절의 딜레마

그러나 철길이 놓인다고 자연스럽게 연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 국경을 오가는 문제가 가장 걸림돌이다. 유럽의 경우 국경 간 이동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솅겐 협정'(Schengen Agreement)이 가능했으나, 통합의 방식이 다른 아세안의 경우 회원국들의 국가주권과 내정불간섭 원칙을 중시하는 '아세안 웨이'(ASEAN Way)를 따르고 있어 유사한 합의가 쉽지 않다. 앞서 소개한 태국-라오스 직통 열차도 양국 심사를 모두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단절 구간을 잇는 작업이 쉽지 않은 점도 넘어야 할 산이다. 말레이시아와 태국 구간뿐만 아니라 동부 노선인 캄보디아와 서부 노선인 미얀마 구간도 여전히 미완성 상태이다. 상이한 열차 폭 규격은 환적 및 대차 교환 문제를 만든다.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 기존 노선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 깔린 1000㎜ 미터궤를 사용하는 반면 중국이 건설 중인 ECRL과 완성된 중국-라오스 철도는 국제규격인 1435㎜ 표준궤를 사용하고 있다. 연결을 위해 새로 놓이는 철길이 또 다른 단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계가 일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철의 강'을 구축한 라오스의 경우 철도 개통 이후 물동량은 증가했지만, 많은 부분이 중국에서 라오스로 유입되는 방향으로 집중돼 있다. 반대로 라오스의 수출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연결망 구상이 중국 이익에 편중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작은 변화, 움직이는 국경

연계를 위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국경에서 일어나고 있다. 2027년 1분기 개통을 목표로 건설 중인 조호르바루-싱가포르 간 4㎞ 길이의 경전철(RTS Link) 노선에 도입될 '세관, 출입국, 관리 및 검역'(CIQ·Customs, Immigration and Quarantine)이 그 주인공이다.
현재 이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조호르바루와 싱가포르 양쪽에서 각각 CIQ 심사를 받고 이동해야 해서 기본 1~2시간, 주말의 경우 3~4시간이 걸린다. 도입 예정인 CIQ는 출발역에서 양국 심사를 동시에 끝내 도착역에서 바로 이동이 가능해 국경 통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 변화의 의미는 양국의 철도 역사를 보면 분명해진다. 과거 말레이시아 국철 KTM은 싱가포르 도심의 탄종파가(Tanjong Pagar) 역까지 운행했다.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이후에도 싱가포르 내의 철로와 역의 소유권과 운영권이 말레이시아 철도청에 남아 양국 사이에 갈등이 오래 이어졌다. 2011년 해당 노선이 폐지되고 종착역이 우드랜즈 역으로 이전하며 KTM이 조호르바루에서 끊기게 된다.
이런 배경을 가진 두 나라가 새 CIQ를 합의한 것은 연계를 위한 작은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경전철을 통해 물리적 연계성을 높일 수 있고, 양국이 민감한 주권 문제를 조정하고 각국의 공무원이 같은 시설에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협력으로 제도적 연계성도 향상할 수 있다. 나아가 수월한 이동을 통한 양국의 인적 연계 역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방식은 아니지만 '아세안 웨이'를 중시하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상당한 제도적 진전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델이 좋은 선례로 자리잡는다면 동남아시아 다른 국경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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