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논단] 빠른 패소, 늦은 승소

차호동 변호사(법무법인 광장)·전 부장검사 2026. 6. 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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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핵심기술이 유출되었다.

기업 임직원들과 수많은 연구원들의 밤샘과 시행착오, 그리고 막대한 투자 끝에 탄생한, 기업의 운명을 건 기술이다. 그리고 기업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오늘 막지 못하면 내일은 늦는다. 해외 경쟁사는 이미 유출된 설계도를 분석하고 있고, 생산라인 구축 계획과 마케팅 전략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사법시스템의 시계는 조금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수사는 신중해야 하고,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 충분한 검토와 절차적 보장은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다. 문제는 그 신중함이 때로는 시장의 속도와 만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경찰 수사와 검찰 수사를 거쳐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질 무렵이면 시장은 이미 몇 번의 계절을 지나 있고, 기술은 여러 세대쯤 진화해 있다.

내연기관 엔진 기술 유출 사건이 접수되었는데 판결이 선고될 무렵 세상은 자율주행과 인공지능 모빌리티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어떨까. 늦게라도 정의는 실현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집에 불이 나 신고했더니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화재 현장에 신축 아파트 분양 현수막이 걸려 있는 기분 아닐까.

물론 이것은 특정 기관이나 특정 구성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사건은 폭증하고, 기술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한다. 반면 수사와 재판은 본질적으로 정확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요구한다. 속도만 높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결국 20세기에 설계된 제도가 21세기의 기술과 산업을 상대하면서 겪는 구조적 긴장, 그리고 정치적 논쟁 속에서 점차 마비되어 온 시스템의 결과에 가까울 수 있다.

과거에는 몇 년의 지연이 단순한 불편함의 문제였다. 지금은 다르다. 그 몇 년이 기업의 흥망을 결정하고 산업의 지형을 바꾼다. 스타트업의 수명주기보다 긴 재판도 있고, 제품 한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보다 긴 수사도 있다. 기술의 세계에서 "언젠가"는 종종 "이미 늦었다"의 다른 표현이다.

만약 어느 가전회사가 냉장고를 판매하면서 배송 예정일을 3년 후로 안내한다면 어떨까. 고객센터 직원이 아무리 친절하게 "주문량이 많고 물량이 부족하다"고 설명해도 소비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경쟁사의 다른 브랜드 제품을 선택할 뿐이다.

물론 사법이 상품은 아니다. 정의를 택배처럼 익일 배송할 수도 없겠다. 그러나 국민과 기업은 적어도 집이 모두 불타버리기 전에 소방차가 도착하는 시스템 정도는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기대가 과연 과도한 요구일까.

특히 국가 핵심기술 유출이나 영업비밀 침해와 같은 사건에서는 시간 자체가 권리의 일부다. 몇 년 뒤의 유죄판결이 상실된 시장점유율, 그리고 폐업한 기업을 되돌려 놓지는 못한다. 사라진 투자 기회와 무너진 경쟁우위를 복구해 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신속성과 적시성은, 정확성의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여야 한다. 아무리 정확한 판단이라도 너무 늦게 도착하면 사회가 기대하는 정의의 대부분은 이미 증발해 버린다. 법이 최종적으로 옳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만큼, 그 결론이 의미 있는 시점에 도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정확한 정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제때 도착하는 정의 역시 필요하다.

이제 모두가 힘을 모아 전문성을 강화하고, 인력을 확충하고, 기술 사건에 맞는 절차를 고민하고, 제한된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일에 바로 나서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경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사법 역시 그 속도에 맞는 진화를 고민해야 한다.

늦은 승소는 때로 빠른 패소보다 더 허무하다.

차호동 변호사(법무법인 광장)·전 부장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