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시선] 최선의 무기가 된 최후의 이성

주미소 판사(부산지법 동부지원) 2026. 6. 6.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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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해결 위해 법정 가기 전에
타협점 찾는 조정 확대 바람직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 했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대화와 양보, 윤리와 관습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최대한의 노력을 한 뒤에도 타협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기대는 '최후의 이성(理性)'이 곧 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법은 어떤가요. 언제부턴가 법은 갈등이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빼 드는 '최선(先)의 무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층간 소음, 가벼운 접촉 사고, 온라인에서의 무책임한 비방과 소모적인 언쟁, 심지어 가족 사이의 사소한 오해에서도 갈등 초기 단계에서부터 "법대로 하자"는 말이 오가고, 이는 타협을 위한 대화의 시작으로조차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법에 의한 절차는 억울한 권리자의 마지막 호소가 아니라 기선을 제압하여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며 승자독식의 분위기 속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자신의 권리에 대한 단 한 치의 제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극단적 방어기제가 작용하고, 대화를 통한 서로의 양보를 손해 또는 패배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논리로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려주는 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인식, 사법 만능주의의 무차별한 확산도 원인입니다.

문제는 갈등 초기 단계부터 법의 잣대만을 내세울 경우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상당하다는 점입니다. 수사 및 사법 자원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음에 반해 법을 통한 해결을 요하는 사건의 종류와 수는 증가하므로, 진정으로 법을 통한 구제가 절실한 사안을 분별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당사자들 역시 소송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쓰고 감정을 소모합니다. 기나긴 공방 끝에 누군가는 승리라는 누군가는 패배라는 결과를 받아 들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감정 소모로 인한 고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진 쪽은 당연히 이긴 것이 아니고 이긴 쪽도 사실상 이긴 것인지 의문인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법을 다시 본연의 자리인 '최후의 이성'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제도적으로는 소송 이전 단계의 '대체적 분쟁해결제도'를 강화하고 그 실효성을 높여야 합니다. 법정으로 향하기 전 객관적 지위에 있는 중재자를 통해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타협점을 찾는 화해 또는 조정 절차를 확대하고 그 문턱을 낮춰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도 따라야 합니다. 정답만을 추구하는 경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한 의견을 가진 타인과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입장 차이를 조율하는 방식에 관한 교육이 학교와 사회에 중요도 있게 뿌리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와 개인의 인식 변화입니다. 법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들을 칼로 무를 자르듯 완벽하게 재단하는 만능열쇠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화와 이해, 관용이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그 누구도 절대적인 패배자로는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서서히 회복한다면, 법은 우리 삶과 공동체를 지키는 진정한 '최후의 이성'으로 그 가치를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미소 판사(부산지법 동부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