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폭력으로 죽는 여성 이틀에 1명 꼴… 그런데도 처벌할 법이 없다
정부, '스토킹법 개정'으로 교제폭력 대응
하나 행위중심법으론 강압적 통제 못 잡아
29년 된 가정폭력처벌법 전면 개정해야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지난 3월 경기 남양주시의 한 거리에서 20대 여성 A씨가 전 연인 김훈(44)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김훈은 약 10개월 전 A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접근금지 명령을 받고도 스토킹을 멈추지 않아 수사를 받고 있던 상태였는데요. 경찰이 구속영장 신청을 미루는 사이 기어이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여성 A씨는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로 경찰에 신고 알림을 보냈지만,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습니다. 피해자가 '죽어야만' 끝나는 교제 폭력의 오랜 패턴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지요.
'여성이 전 연인이나 전 남편, 전 동거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옵니다. 가해자들의 범행 동기는 대개 같습니다. '거절당해서'죠.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재회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흉기를 휘두릅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를 통제하고 자신의 영향력 안에 가두려는 의지가 좌절될 때 가장 극단적인 방식인 살해를 택합니다.

이 같은 '거절 살인'은 매년 가파르게 늘고 있습니다. 교제 폭력 112 신고 건수는 2017년 3만6,267건에서 2024년 8만8,394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분석한 결과, 2009년부터 2024년까지 16년간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560명, 살인미수까지 더하면 최소 3,613명이며, 주변인 피해까지 포함하면 최소 4,423명이다. 2024년 한 해간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81명으로 이틀에 한번 꼴로 여성이 목숨을 잃은 셈이다.

스토킹처벌법에 교제폭력 끼워넣자는 정부...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교제 폭력은 여전히 입법 공백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법은 가정폭력처벌법과 스토킹범죄처벌법, 성폭력처벌법이 전부입니다. 혼인 관계로 묶이지 않은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다루는 법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아요.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가 폐기되기를 반복했습니다. 여성 의제에 유독 소극적이었던 윤석열 정부가 이 문제를 방치해왔기 때문인데요.
이재명 정부는 어떨까요. 출범 1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가 없긴 하지만,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 정부는 스토킹처벌법을 개정해 교제 폭력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인데요. 지난 1월 법무부는 '2026 상반기 10대 법안'을 발표하며 스토킹처벌법 개정을 추진해 교제 폭력 처벌의 길을 열겠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9월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가 2023년부터 시행 중인 '스토킹방지법' 일부 개정안을 의결해 보호 대상에 교제 폭력 피해자를 포함시키겠다는 방침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스토킹처벌법은 '친밀한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교제 폭력을 담아내기엔 한계가 분명한 법이거든요. 지난해 11월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주최한 인권보고대회에서 교제 폭력 입법 관련 발제를 맡았던 민고은 변호사는 "스토킹처벌법은 스토킹 행위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규정해 '행위'가 중심이 되는 반면, 교제 폭력은 '관계'를 중요 표지로 한다"며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함께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교제관계 내의 폭력은 워낙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스토킹이라는 폭력 행위의 특정 유형에 초점을 두는 법률에 포함시키는 것엔 무리가 있다는 뜻인데요.
실제로 스토킹처벌법은 층간소음 분쟁이나 채권·채무 관계의 다툼까지 포섭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실상 행정 편의에 입각한 발상"이라며 "스토킹처벌법에 '교제 관계'에 대한 정의가 협소하게 들어갈 경우, 오히려 지금의 스토킹처벌법보다 규율 범위가 더 좁아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우려"라고 비판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스토킹처벌법 개정만으로는 '죽어야 끝난다'는 교제 폭력의 패턴을 결코 깰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교제 폭력 입법 과정에 오랫동안 참여해 온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스토킹처벌법만으로는 '강압적 통제'를 당하는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강압적 통제란 피해자의 행방을 추적하고 감시하거나 타인과의 교류를 제한하는 등, 피해자가 공포심을 느낄 정도로 자율성을 억압하는 조종 행위를 뜻하는데요. 영국은 이미 11년 전 가정폭력 범죄에 별도로 규정한 개념입니다.
허 조사관은 "스토킹처벌법의 범죄 구성요건에는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라는 조항이 있는데, 정작 강압적 통제를 당하는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 가해자의 말에 거역하지 못한다"며 "그런데도 수사기관은 피해자에게 '언제 명시적으로 거절했는지'를 입증하라고 요구하니, 결국 피해자는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어 "실제 발생하는 교제 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하는 순간, 머지않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거절 여부를 중심에 두는 스토킹처벌법만으로는 거절 의사조차 제대로 표시할 수 없는 피해자를 '죽기 전에' 구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30년 묵은 가정폭력처벌법, 통째로 다시 짤 시점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시민사회와 학계의 의견은 한 방향으로 모입니다. 29년 된 낡은 가정폭력처벌법을 통째로 다시 짜야 한다는 것입니다. 1997년 결혼이 보편적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이 법은 혼인·혈연 관계로 묶인 '가정구성원' 사이의 폭력만 협소하게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사이 한국 사회의 친밀성 양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1인 가구가 늘었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등장했죠. 김 연구위원은 "현재 가정폭력처벌법은 변화한 '친밀한 관계'의 구조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며 "일단 '가정 보호'라는 목적 조항부터 폐지하고, 피해자 보호와 지원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면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22대 국회에는 이미 가정폭력처벌법 전부개정안 3건이 발의돼 있습니다. 용혜인(2024년 9월 발의)·정춘생(2024년 7월 발의)·전진숙(2025년 6월 발의) 의원의 안입니다. 세 안 모두 △법률명을 '친밀한관계폭력처벌법' 등으로 바꾸고 △'친밀한 관계'의 정의를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확장하며 △강압적 통제 개념을 법안에 담는 방향을 공유합니다. '이름만 빼고 다 바꾼다'는 수준을 넘어 '이름까지도 모조리 바꾼다'는 수준의 새판 짜기인 셈입니다.

김 연구위원은 사각지대에 놓인 교제 폭력 피해자를 가정폭력처벌법의 보호망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입법 공백의 가장 큰 문제는 법률혼·사실혼에 이르지 못한 친밀한 관계의 피해자들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라며 "가정폭력처벌법을 친밀한관계폭력처벌법으로 고쳐 교제폭력을 포함시킨다면, 피해자 보호명령 등의 조치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강압적 통제'라는 개념을 법에 명시하는 것 역시 중요한 핵심 과제입니다. 김 연구위원은 "강압적 통제는 친밀한 관계 폭력을 발생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며 "영국은 가정폭력의 유형에 '통제적 또는 강압적 행동'까지 별도로 포함하고 있고, 호주 역시 같은 방향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친밀한 관계의 가해자는 굳이 스토킹을 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 표정 하나로 피해자를 통제할 수 있다"며 "외부에서 볼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피해자의 일상은 이미 파괴되어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교제폭력 입법'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가정폭력처벌법의 독소 조항을 일거에 걷어낼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허 조사관은 이참에 가정폭력처벌법에 남아 있는 반의사불벌죄와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는 가해자가 상담만 받으면 기소를 피할 수 있는 구조 탓에 사실상 제대로 된 처벌이 불가능했기 때문인데요. 그는 "미국은 이미 1984년에 도입한 의무체포 제도에 따라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오면 가해자를 그 자리에서 분리하고 체포한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현장에서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부터 묻고 있어, 결국에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제도를 뜯어고쳐야 할 때"라고 짚었습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1주년을 앞두고, 교제 폭력 입법은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 스토킹처벌법에 교제 폭력을 끼워 넣어 국정과제를 형식적으로 완수하는 길, 그리고 가정폭력처벌법을 완전히 새롭게 설계해 '친밀한 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을 폭넓게 보호하는 길. 어떤 길을 택할지, 그 답은 정부와 국회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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