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경험해 보는 향의 크기와 맛의 집중력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6. 6. 6. 00: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젤라토
서울 마포구 ‘피에트라’의 아말피 레몬 젤라토. /강은이 영상미디어 인턴기자

회사에서 외근을 나왔다. 마곡에서 양평동을 지나 홍대까지 돌았다. 협력사, 관계사같이 친구인 듯하지만 친구가 아닌 회사를 찾아 오래 이야기하고 짧게 점심을 먹었다. 소화도 시킬 겸 잠깐 걷자는 말이 나왔다. 날이 맑아 햇빛이 그대로 얼굴에 닿았다. 드문드문 심은 나무가 차르르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다.

10년 전 가봤던 피렌체가 떠올랐다. 낮은 구릉 사이로 펼쳐진 포도밭과 높은 하늘. 건조한 공기 속에 떨어지는 햇볕에 옷이 바스락거렸다. 그러다 그늘로 들어가면 상쾌한 공기가 숨어 있었다. 작열하듯이 더운 것도 아닌,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그 냉온탕 사이에서 젤라토의 온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일반 아이스크림이 대략 영하 20도라면 젤라토는 영하 10~12도 언저리다. 동네마다 가게가 있고 두부처럼 바로 만들어 팔았기에 오래 보관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의 혹독한 여름은 오히려 젤라토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류의 즉시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로 사람들의 취향을 몰고 갔다. 지금도 동남아에 가면 주스나 음료를 주로 마신다. 더운 것도 문제지만 갈증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젤라토 가게는 점조직처럼 여기저기 무작위로 흩뿌려진 듯 자리 잡고 있다. 그 집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산책을 하며 걷는 경의선숲길 후미진 곳에 마치 우연처럼 젤라토 가게가 있었다. 흰 글자를 하나하나 붙여 넣은 이름은 ‘피에트라’였다. 주인장은 혼자 카운터에 서서 손님을 맞았다. 드러머같이 다부진 체격의 그는 기합을 불어넣듯이 인사를 했다. 홀 끝에는 가슴 높이의 스테인리스 매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재료와 설명을 적은 종이가 가지런했다. 뒤쪽엔 동그란 뚜껑 10개가 박혀 있었다. 테이블과 좌석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가게보다는 수행을 위한 선방으로 보였다. 아카시아, 아말피 레몬처럼 재료명이 그대로 박힌 이름을 보며 고르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여름 한철 나고 사라지는 완두콩 젤라토가 시작이었다. 콩의 풋내가 아니라 푸른빛이 맴도는 향긋함, 그 뒤로 잔잔히 이어지는 고소함만 남았다. 새벽 텃밭을 걷는 듯 산뜻했다. “콩류가 참 어려워요. 좋은 것 구하기도 어렵고 관리도 힘들거든요.” 주인장은 젤라토를 고를 때마다 재료 설명을 해줬다.

젤라토는 아이스크림에 비해 유지방 함량이 낮고 내놓는 온도가 높아 재료의 맛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베트남산 카카오 원두를 굽고 갈아 만든 초콜릿 젤라토는 용암 같은 밀도로 맛이 뚝뚝 떨어졌다. 8평 정도 되는 주방에서 카카오 열매부터 초콜릿을 만들어 쓴다고 설명하는 그의 눈빛은 좋아하는 것에 활짝 웃는 아이 같았고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장인의 자부심도 엿보였다. 유채물감을 쓴 듯 선명한 색의 피스타치오 젤라토는 향의 크기와 맛의 집중력이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주인장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젤라토를 만들기 위해 시칠리아의 브론테 마을에서 직접 피스타치오를 수입한다고 했다. 흔히 쓰는 미국산 피스타치오는 견과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브론테 피스타치오는 그보다는 꽃향기, 허브, 그리고 송진 향이 은은하게 묻어난다. 어느 면에서는 올리브 오일의 풍미와 비슷했다. 아말피 레몬은 말 그대로 이탈리아 아말피의 현지에서 짠 레몬즙을 그대로 들여와 만든 젤라토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이 실제 레몬을 반 잘라 그릇처럼 썼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일반 레몬의 2배 정도 크기인 아말피 레몬 수준으로 종자를 개량하여 제주도의 한 농부와 계약해 쓴다고 했다. 마치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제 맛이 달랐기 때문이다. 레몬 한 가지로 셔벗과 젤라토를 각각 뽑아 함께 담아냈는데 셔벗에서는 신맛과 상쾌한 향이, 젤라토에서는 아말피 레몬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저 시고 단 맛이 아니라 비강을 채우는 과실의 향과 입에서 녹는 질감이 더해져, 과일 그 이상을 먹는 듯했다.

혹시라도 녹을까 허겁지겁 젤라토를 먹었다. 체온만으로도 가볍게 녹아버린 젤라토가 혀를 감싸 안았다. 짧은 초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살짝 스치는 이 바람에도 따지다 보면 멀리 저 지중해의 몫이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바다와 선원들의 노랫소리, 바람과 태양, 그 차가우면서도 농밀한 맛이 몸 안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리고 먼지를 털듯 툭툭 일어나 다시 회사로 향했다.

#피에트라: 아말피 레몬 1만7000원, 브론테 피스타치오 1만원, 베트남 빈투바 초콜릿 1만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