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을 떠난 성소수자들

크리스 2026. 6. 5. 19:1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퀴어로 살아가기⑶ 퀴어 부부의 미국 이민

2013년 캐나다에서 결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냥 부부로 살고 싶었다. 우리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 할리우드 프라이드 기간, 퍼레이드에 참여해 거리를 걷고 있는 아콘네 부부. [사진 제공-크리스]

우리는 그냥 부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막연하게 캐나다 이민을 생각했다.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했고, 우리를 부부로 인정해준 나라이기도 했다. 토론토에는 외가 친척들도 많이 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결혼 사실은 숨겼지만,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낯선 땅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커밍아웃이 두려워 이민 대행사도 쓰지 않고 둘이 직접 이민 신청 서류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해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이민 선발 정원(cap)이 이미 찼다며 서류를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

사실 미국 이민은 한동안 생각도 못 했었다. 동성혼이 연방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합법화된 게 2015년이었고, 이민 심사가 더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라니까. 그런데 미국 고용주 없이도, 한국에 살면서 부부가 함께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NIW(National Interest Waiver, 국가이익 면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미국 이민 전문 대행사를 찾아 수속을 밟았다. 처음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해외에서 혼인했지만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만 말을 돌렸다. 그러다 막판에야 캐나다에서 결혼한 동성 부부라며 혼인증명서를 제출했다. 대행사 측 반응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증빙 서류를 받아줬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넸던 교황 프란치스코를 추모하며 조기를 게양한 웨스트 할리우드. [사진 제공-크리스]

2018년 여름,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 인터뷰 날. 깐깐하기로 소문난 한국계 미국인 영사가 우리를 호출했다. 유리판 너머로 학력, 경력, 추천서를 하나씩 확인하던 영사가 서류 사이에서 혼인증명서를 발견했다. 동성 부부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리고 물었다. “Do you have children?”(아이가 있나요?)

나는 답했다. “No, not yet, but I hope so.”(아직은 없어요. 바라건대 언젠가는요.)

우리를 부부로 봤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아이 교육을 위해 아내와 아이만 미국에 보내고 자신은 기러기로 남으려는 남편들은 심사에서 보류되기도 한다. 우리는 동성 부부였지만, 함께 이민하는 가족이었다. 30분 넘게 경직돼 있던 몸이 조금 풀렸다. 마지막에 영사가 무언가를 말했는데 긴장한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Congratulations!”(축하합니다!)라고 했을 때야 믿어졌다.

한국 국적의 여성 부부로서 동시에 발급받은 미국 영주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의 관계가 제도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국 정부는 캐나다 혼인증명서를 근거로 우리를 부부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고, 결혼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는 부부입니다’라는 말이 가벼워지는 곳

한국에서 미국 영주권을 받은 후, 우리 부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천천히 뿌리내릴 곳을 찾았다. 미국 학교나 회사에 소속되는 조건 없이 영주권을 받았기에, 우리 스스로 정착할 동네를 고를 수 있었다. 그 자유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학했던 실리콘밸리 근처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사이에서 한 달 살아 보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도시로 손꼽히는 샌디에고도 둘러본 끝에 결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에 속하는 웨스트 할리우드에 정착했다.

▲ 화사한 꽃들 너머로 무지개 플래그가 채색된 웨스트 할리우드 슈퍼마켓의 일상 풍경. [사진 제공-크리스]

미국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부부로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공동명의 은행 계좌를 열었다. 집도, 자동차도 함께 소유했다. 매년 부부 합산으로 세금 보고를 하고, 세금 공제도 부부로 받는다. 한국에서 사람들은 우리 관계를 모녀로 보기도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 미국에 살면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는 한마디 말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가 거주지로 선택한 건물에는 입주민 절반 이상이 성소수자다. 아래층과 위층, 옆집에도 퀴어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저 반갑고 편한 이웃이다.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인이지만, 입주민 투표로 입주자대표회의 이사에 당선됐다. 이사 5명 중 4명이 여성 퀴어이고, 나머지 한 명은 발코니에 프라이드 깃발을 단 앨라이(지지자)다.

웨스트 할리우드는 굳이 6월(Pride Month)이 아니어도, 성소수자의 존재가 일상 속에 스며 있는 동네다. 무지개색 횡단보도와 상점 창가의 작은 표식들이 서로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그리고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웨스트 할리우드 전체가 하나의 축제장으로 변한다. 멀리 이동할 필요도 없다. 집 앞 길목에서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는 Ari의 손을 잡고 그저 걷는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Lady Gaga의 〈Born This Way〉(“나는 잘 나가고 있어. 원래 이렇게 태어났으니까”라는 가사가 담긴 이 곡은 퀴어 공동체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가 우리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 웨스트 할리우드 도서관의 LGBTQ+ 섹션. 성소수자 관련 도서와 DVD가 공공의 공간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사진 제공-크리스]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사는 성소수자들

한국에서는 퀴어문화축제 날이면 동성애 혐오 세력이 주변을 둘러싸고 맞불 집회를 열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를 지키는 거룩한 방파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방파제가 없어도, 웨스트 할리우드의 일상은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간다.

직장은 LA 북쪽의 미디어 도시, 버뱅크(Burbank)에 있었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곳에서, Ari와 나는 한국어 음성과 관련된 인공지능(AI)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작업은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일상의 언어라기보다, 기계가 학습해야 할 언어에 가까웠다.

다행히 우리의 일상은 미국에서 이어졌다. 동료 중에도 퀴어가 여럿 있었다. 터키나 이란처럼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나라를 떠나 미국에 정착해 결혼했다는 게이 커플도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사는 성소수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다. 우리 역시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부부로서 살아가기 위해 모국을 떠나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

▲ 퀴어 프라이드 기간을 맞아 성소수자 관련 어린이 동화책들이 진열된 버뱅크(LA 북쪽의 미디어 도시)의 한 서점 풍경. [사진 제공-크리스]

우리 부부는 웨스트 할리우드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성당에 다니지만, 설날에 LA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 성당에 간 적이 있다. 떡국을 준다는 얘기에 혹해서. 우리 부부가 성당 옆 회합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작은 한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외동포 사회는 생각보다 폐쇄적이었다.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진 부모 아래서 자란 성소수자 아이들이 한국만큼이나 힘든 가정생활을 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가 말하는 완고한 성가정—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언어는 미국 한인 성당에서도 그대로였다.

미국에서 만난 가톨릭 여성 퀴어 모임 ‘알파오메가’ 회원은 LA 남쪽 토런스(Torrance) 지역 한인 성당 청년 모임에서 캘리포니아주의 성소수자 차별 금지 정책을 비난하는 분위기에 실망했다고 했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쉬이 들리지 않는다. 한국의 보수 우익 청년들 못지않게, 미국 한인 청년들 중에도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이들이 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고통받는 퀴어 청소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많은 한인 가톨릭 인구 중에 우리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쉽게 멀어지지 않았다. 나이 들어 가시는 부모도, 수십 년이 쌓인 관계들도 거기 있으니까.

Copyright © ilda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