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라는 이름의 안개가 빚어낸 와인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6. 6. 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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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안개는 거의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영향력을 떨칩니다. 주인공이 서울을 떠나 고향 무진에 닿으면 그곳엔 늘 안개가 자욱합니다. 명료한 것을 흐리게 만들고, 떠나온 도시의 질서와 책임을 잠시 지워버리는 역할이죠.

무진의 안개 속에서 주인공은 현실의 자기와 다른 누군가가 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가까워지며, 끝내 무엇 하나 분명히 매듭짓지 못한 채 다시 서울로 돌아갑니다. 안개는 풍경이 아니라 정신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무언가를 덮고, 흐리게 하고, 책임을 유예시키는 것. 문학 속 안개는 대체로 그렇게 일을 합니다. 진실을 가리는 쪽으로요.

그런데 지구 반대편, 칠레의 한 사막에서는 안개가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그곳의 안개에는 카만차카(Camanchaca)라는 이름까지 있습니다. 안데스 원주민 언어인 아이마라어에서 온 말로, ‘어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태평양에서 밀려와 해안 사막을 뒤덮고, 길과 방향을 지우는 안개입니다.

칠레의 와인 명가 콘차이토로(Concha y Toro)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둠의 안개가 매일 덮는 땅을 가리켜 “지구상에서 가장 빛나는 곳”이라 부릅니다. 실제로 이 땅은 ㎡당 2177와트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지표 일사량을 기록한 곳입니다. 강수량이 거의 없고 태양 복사량이 지상 최고 수준에 이르는 곳이죠.

빛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위태로운 그 땅을, ‘어둠’이라는 이름의 안개가 식히고 다스리면서 포도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요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주 와인프릭은 ‘어둠’이라는 이름의 안개가 매일 아침 ‘가장 빛나는 사막’을 덮어야만 태어나는 와인의 이야기입니다.

카만차카, 비행기에서 본 아타카마 사막 위의 안개. [위키피디아]
‘어둠’의 정체는?
카만차카는 우연한 날씨가 아니라 세 가지 힘이 맞물려 매일 반복되는 구조적 현상입니다. 첫째는 바다입니다. 칠레 해안을 따라 차가운 바닷물이 흐르는 훔볼트 해류(Humboldt Current) 위로 따뜻한 공기가 지나가면, 수증기가 식으면서 짙은 해무로 응결합니다. 둘째는 바람입니다. 태평양 해풍이 이 안개를 육지 안쪽으로 밀어 올립니다. 셋째는 지형입니다. 해안 산맥과 계곡이 안개를 가두고 흐르게 하면서 특정 지점에 머물게 합니다.

콘차이토로의 케브라다 세카(Quebrada Seca) 포도밭은 태평양에서 약 23km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더 가까우면 너무 습하고, 더 멀면 안개가 닿지 못합니다. 이 23km라는 거리가 곧 이 포도밭의 정체성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안개의 시간표입니다. 새벽부터 스멀거리며 등장한 안개는 오전 9시 무렵 최고로 짙어지면서 포도밭 전체를 은회색으로 덮습니다. 그러다 11시가 되면 옅어지기 시작하고, 오후 1시 무렵엔 거짓말처럼 걷혀 사막의 강렬한 태양이 포도밭에 쏟아집니다. 하루 안에 어둠과 빛이 교대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침 안개는 기온을 끌어내려 포도가 산도를 잃지 않도록 붙잡고, 한낮의 태양은 포도를 익혀 당분과 풍미를 채웁니다. 무진의 안개가 하루 종일 도시를 흐려놓는 것과 달리, 카만차카는 정확한 시간에 왔다가 정확한 시간에 물러납니다.

그리고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사막에서, 안개는 또 하나의 역할을 합니다. 바로 물입니다. 강수량이 연간 수십 밀리미터 수준에 그치는 땅에서, 새벽마다 내려앉는 안개는 포도밭에 미세한 수분을 공급하는 천연 관수 장치가 됩니다. 비 대신 안개로 적시는 땅인 겁니다.

카만차카 효과. [아영FBC]
빛이 준 것을 덜어내는 일
이곳 리마리(Limarí)에서 샤도네로 만들어지는 화이트 와인 아멜리아는, 오랫동안 칠레 와인 지도의 변방이던 이 지역을 단숨에 끌어올린 전환의 상징입니다. 권위 있는 매체들의 높은 점수와 “칠레 최고의 샤도네”라는 평가가 잇따르고, 한 평론 매체는 2025년 세계 100대 와인에 올리며 ‘칠레 샤도네 1위, 세계 샤르도네 5위’로 꼽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아멜리아라는 한 병의 와인 안에 모순이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알코올 13.5도. 사막의 강한 태양이 포도를 익혀 만든 무게입니다. 보통 이만큼 더운 곳에서 익은 포도는 산미를 잃습니다. 빛이 당분을 끌어올리는 대가로 산미를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와인에는 더운 기후의 무게와, 서늘한 기후에서나 나올 법한 팽팽한 산미가 함께 있습니다.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가 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빛이 무게를 줬다면, 그 산미는 누가 지켰을까요. 매일 아침 기온을 끌어내린 안개입니다. ‘어둠’이 지켜낸 긴장이 잔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카만차카를 포집하기 위한 촘촘한 그늘 포집기 ‘아트라파니에블라’ [위키피디아]
빛과 어둠이 맺는 휴전
무진의 안개는 소설 마지막까지 끝내 걷히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안갯속에서 흐려진 채 무엇 하나 매듭짓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가고, 안개는 여전히 그 도시를 덮고 있습니다. 문학이 안개를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안개는 인간이 끝내 다 보지 못하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이름이니까요.

하지만 리마리의 안개는 다릅니다. 카만차카는 오전에 왔다가 정오를 지나 물러납니다. 매일 정확하게 가리되 영원히 가리지 않고, 식히되 얼리지 않습니다. 무진의 안개가 인간을 흐려 놓는다면, 이 안개는 포도를 또렷하게 빚어냅니다. 같은 이름의 어둠이지만, 하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니 이 와인의 정체는 균형입니다. 빛이 이겼다면 와인은 늘어졌을 것이고, 어둠이 이겼다면 익지 못했을 것입니다. 균형은 둘 중 하나가 이긴 자리가 아니라, 빛과 어둠이 매일 아침 맺는 휴전 위에 서 있습니다.

무진의 안개처럼 모든 게 가라앉고 늘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이라면, 아멜리아 한 잔을 권합니다. 빛이 너무 강한 땅에서 오히려 어둠이 지켜낸, 그 서늘하고 팽팽한 산미가 흐려진 하루의 윤곽을 다시 또렷하게 세워 줄지도 모릅니다.

※ <매경+ 와인프릭>에서 더 자세히 다룬 이야기

- 안개의 경제학 — 칠레 북부에서 50년 넘게 이어온 ‘안개 포집기(아트라파니에블라)’, 오지 마을에 하루 1만5000리터를 공급한 식수 프로젝트, 안개로 빚은 맥주도

- 23km의 미시 기후는 어떻게 가격이 되는가 — 변방이던 리마리가 ‘서늘한 사막’이라는 희소 원산지로 전환되며 프리미엄을 만든 구조

- 와인메이커가 ‘하지 않은 일’ — 따뜻한 기후 샤도네가 즐겨 택하는 말로락틱 발효(MLF)를 거부한 이유, 그 절제 뒤에 있는 양조자의 철학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와인프릭 연재는 프리미엄 유료 멤버십 플랫폼 ‘매경플러스’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경플러스(mk.co.kr/plus)를 주소창에 입력하거나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시면 사이트에 접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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