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못 했는데 국가배상 받을까”… 투표용지 부족 사태 법정 가나

지난 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서울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하거나 투표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태가 국가배상 쟁점으로 번지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서울시장 선거의 표 차 등을 고려할 때 선거무효가 인정될 가능성은 낮지만, 실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가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3일 오후 6시 20분 기준 서울 송파구 12곳, 강남구 1곳, 광진구 1곳 등 14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이 발생했다. 송파구에서는 유권자 수의 50% 수준만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지연됐고, 장시간 대기 끝에 투표를 포기한 유권자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서울시장 선거는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당선)와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표 차가 5만3465표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선거 결과 자체가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많다. 다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와 별개로, 개별 유권자가 선관위의 과실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면 국가배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거무효와 다른 국가배상… “개별 손해 따져야”
국가배상청구의 근거는 국가배상법 제2조다.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배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다. 선거 사무를 맡은 선관위가 투표용지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했다면 배상 책임이 문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 관련 사건을 다수 맡아 온 법무법인 충정의 김연기 변호사는 “선거무효와 국가배상은 별개”라며 “선거무효는 선거 자체의 효력에 관한 문제로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하지만, 국가배상은 개별 유권자가 입은 손해를 전보받는 문제”라고 했다. 이어 “표 차가 커서 선거무효가 어렵다는 사정은 국가배상 성부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안에서는 선관위의 투표용지 준비·배부가 직무집행에 해당하는지, 유권자 수보다 적은 투표용지를 준비한 것이 직무상 과실 또는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 그 결과 유권자가 실제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는지가 쟁점이 된다.
양홍석 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는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것 자체가 선관위가 적절히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뜻”이라며 “법 위반의 고의까지 보지 않더라도 중대한 과실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투표용지는 사전에 충분히 준비돼 있어야 하는 선거 사무의 기본 요소라며, 현장에서 부족분을 사후적으로 보충하거나 운반하는 방식 자체가 위법성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마감 전 도착했지만 못 찍은’ 유권자가 핵심
다만 국가배상이 자동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소가 혼란스러웠거나 오래 기다렸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유권자가 투표 마감 전 투표소에 도착했는지,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이나 현장 안내 미흡 때문에 투표를 포기했는지, 그 결과 실제 손해가 발생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김 변호사는 “핵심은 인과관계와 손해의 발생”이라며 “마감 전 해당 투표소에 도착한 정당한 선거인이었고, 선관위의 용지 부족 또는 안내 미흡 때문에 실제로 투표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점까지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소송에서는 현장 영상, 대기번호표, 본인 확인 시각, 목격자 진술, CCTV 등이 주요 자료가 될 수 있다. 양 변호사는 “투표소에 갔지만 투표하지 못하고 나온 상황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기표 사진이나 현장 사진·영상 등도 손해와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상당인과관계가 쟁점이 된다. 상당인과관계란 손해가 단순히 시간상 뒤따라 발생했다는 뜻이 아니라, 선관위의 잘못이 없었다면 통상 그런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투표 마감 전 도착했지만 투표용지가 없어 투표하지 못하고 돌아간 유권자는 인과관계가 비교적 뚜렷할 수 있다. 반대로 대기번호표를 받은 뒤 늦게라도 투표를 마친 유권자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손해를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다.

◇투표권 침해 위자료 인정될까… 액수는 ‘상징적 수준’ 가능성
손해의 성격도 쟁점이다. 투표권은 금전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헌법상 기본권이다. 이 때문에 실제 소송에서는 재산상 손해보다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 즉 위자료 인정 여부가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위자료는 국가배상과 별개의 제도가 아니라, 국가배상청구에서 인정될 수 있는 손해배상 항목 중 하나다.
김 변호사는 “법원이 한 표의 객관적 금전가치를 매기는 방식은 아니고, 침해된 선거권의 중대성, 침해 경위와 대기 시간, 선관위 과실의 정도 등을 종합해 위자료를 정하게 될 것”이라며 “성격상 인용되더라도 액수는 상징적·소액 수준에서 다투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양 변호사는 기존 하급심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2015년 대구에서 본인 확인 절차 문제로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에게 30만원이 인정된 사례, 2023년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와 관련해 100만원이 인정된 사례를 언급했다.
다만 양 변호사는 “이번 사안은 선관위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단순 본인 확인 문제와는 다르다”며 “법원이 투표권 침해의 중대성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쟁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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