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부족 사태, '고의 아니냐' 음모론 제기한 조선일보
선관위 예측 실패로 용지 부족해 투표 지연, 발길 돌린 유권자도
국힘 송언석 언급한 '베를린은 선거무효' 사례만 따라간 매체들
개표방송에 집중한 방송사, 사태 심각성 대비 부실한 보도 지적도
[미디어오늘 노지민, 김예리 기자]

6·3 지방선거 본투표 당일 서울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지역 유권자 수 절반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만 준비했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해명은 선관위의 기본적인 투표 관리 체계 전반을 점검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초유의 사태에 유권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언론 가운데 일부는 혼란을 부추기거나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국민의힘, 투표 지연에 곧바로 '선거연기' '선거무효' 꺼내들어
중앙선관위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사과한 건 지난 3일 오후 9시, 그 직후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송 원내대표는 개표중단과 함께 공직선거법 제196조에 의한 선거 연기를 요구했다. 또한 “지난해 독일 베를린 지방선거에서 독일 헌법재판소가 선거 당국의 총체적 부실 운영이 투표권 행사를 방해하고 선거 결과를 왜곡했다는 사유로 선거 전면 무효를 선언하고 재투표를 명령한 사례가 있었다”고 했다. 뒤이어 장동혁 대표는 선거무효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송 원내대표가 말한 공직선거법 제196조는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선거를 실시할 수 없거나 실시하지 못한 때'에는 대통령이나 관할 선거구의 선관위원장이 지자체장과 협의해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당시에는 선거가 실시된 가운데 서울 일부 투표소에서 지연이 발생하면서, 같은 법 제155조에 따라 마감 시각에 투표소에 도착한 유권자들은 번호표를 받아 대기하다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한 상태였다.

베를린 재선거, 선거구간 뒤바뀐 투표용지·무효표·의석 배분 영향 등 종합적 판단
베를린 사례는 송 원내대표 발언과 일부 시점이 다르고, 투표용지 부족 외에도 여러 요인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재선거가 시행된 사안이다. 베를린에선 2021년 4가지 선거(주의회·구의회·연방의회·주민투표)가 한 번에 치러졌다. 이 가운데 주의회·구의회 선거는 2022년 11월 베를린 주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연방의회 일부 투표구 선거는 2023년 12월 연방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재선거가 진행됐다. 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여러 선거가 한 번에 시행되는 날 대규모 마라톤까지 겹쳐 혼잡한 상황에서 선거 준비와 과정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의석 배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베를린 주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주선관위가 1인당 투표 시간을 지나치게 짧게 계산해 한 투표소당 유권자의 26% 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거 준비 과정에서 특정 선거구 간 투표용지가 뒤바뀐 일이 있었음에도 문제 사례를 파악하지 않아 12개 선거구 중 최소 5개 선거구에서 잘못된 투표용지를 배부했고, 일부 투표소에선 선거규칙에 위배되는 투표용지 사본을 제작해 무효표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주의회 의석 가운데 약 60%(147석 중 88석)가 이런 선거상 하자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 추산됐다. 연방헌법재판소도 이런 문제를 들어 2256개 투표구 중 455개 투표구의 연방의회 재선거를 결정했다. 투표 대기시간과 투표 시간의 연장은 그 자체만으로 선거상 하자라 볼 수 없지만 의석 배분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국내 상황과 비교 없이 '베를린은 투표지 부족해 재선거했다' 되풀이하고 확산
그러나 송 원내대표는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구체적인 규모나 영향 등이 파악되지 않은 시점에 베를린 사례를 들어 재선거 필요성을 시사했다. 이후 오후 9시54분께 조선일보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 2021년 獨 베를린은 재선거> 제목으로 베를린 사례를 다루면서 “이번 서울시 선거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도 있었다”고 언급했다.
조선일보 보도 이후 머니투데이, 한국경제, 조선비즈, 뉴데일리, 중앙일보 등 다수 매체가 서울의 투표용지 부족사태와 어떤 공통점이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비교·분석 없이 베를린 사례를 전했다.
공영방송 KBS도 <2021년 독일에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 헌재 판단은?> 제목으로 베를린 재선거 사례를 국내 사례와 비교 없이 보도했다. 유튜브 및 홈페이지에는 지난 3일 개표방송 도중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패널들이 대담한 내용을 클립 영상으로 올리면서 <초유의 투표 중단 상황 “개표 중지 우선 아닌가요?”>라는 문구를 제목과 섬네일에 썼다.

조선일보,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근거 없이 “선관위가 고의적으로 숨긴 것 아닌가”
나아가 월간조선은 <“야당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선거소청-선거 무효 소송 나서야”> 제목으로 사실상의 선거 불복을 종용하는 취지의 주장을 싣기도 했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투표지 부족으로 투표 못 하다니, 정상 선거라 할 수 없다> 제목의 사설에서 “선관위가 고의적으로 숨긴 것 아닌가”라거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지역은 대부분 야당 우세 지역이었다. 이는 우연인가”라는 등의 근거 없는 음모론을 펼쳤다.
이는 4일 새벽 1시30분께 CBS노컷뉴스가 <'투표지 부족'으로 개표 중단이나 재선거까지 가능할까> 기사에서 국민의힘의 개표중단과 재선거 주장을 전하면서도 현행법의 내용과 예상되는 쟁점을 함께 정리해 보도한 것과 대비된다. 아주경제의 경우 3일 밤 10시18분께 <송언석이 소환한 '베를린 재선거' 뭐길래> 기사에서 송 원내대표가 베를린 재선거에 대해 시기와 판단 주체, 선거 종류 등을 일부 뒤섞어 말한 부분을 바로잡는 한편 한국 상황과 베를린 사례를 동일선상에 놓기 애매한 지점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당선되자 정부 책임론… 목소리 높이는 음모론자들
이와 달리 '베를린은 재선거를 했다'는 사례만 부각한 보도들을 두고 “정확히 우리 선거법에서 어떠한 것들이 문제가 되는지, 그래서 실제 재선거로 이뤄질 수 있는지” 등의 기본적인 판단이 생략됐다는 지적이 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저널리즘적인 절차를 준수한 사실 확인을 건너뛰고 (국내와 해외 사례의) 차이점을 건너뛰었다”라는 점에서 “정파적인 입장이 더 강하게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라고 봤다.
3~4일에 걸쳐 개표방송을 지속한 주요 방송사의 경우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했다. 관련해 김 위원장은 “개표방송에 모든 역량을 '올인'해서인지 대응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표방송 와중에 급히 전문가를 섭외해서라도 이 사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쟁점이 될 수 있는지 보도하고 선관위도 밀착취재할 수 있었어야 하는데 초반부 대응이 오히려 늦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질적으로 좋은 보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어떤 곳은 지나치게 앞서나가고 또 어떤 곳은 너무 대응이 안 된 복합적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처음 베를린 사례를 거론하며 재선거 요구를 꺼내들었던 국민의힘은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당선이 사실상 확정되자, 선거 효력을 문제 삼기보다 선관위 사무총장 사퇴와 이재명 정부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국민의힘이 개표 중단을 요구하며 베를린 사례를 꺼내든 때는 개표 현황에서 정원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득표율이 앞서는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소위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매체들의 재선거 필요성을 시사하는 보도들도 잠잠해진 양상이다. 그러나 그간 부정선거 음모론을 펼쳐온 인사들은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빌미로 선거가 무효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도하지 않으면 부정선거론의 불쏘시개로 쓰이는 소재만 될 뿐”
지금과 같은 국면에선 앞으로의 보도가 더 중요하다. 유성진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장(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교수)은 “해외에서도 그런 사태(투표 관리 부실)는 부지기수인데 다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못 미친다는 점에서 넘어간 사례들이 많다”며 “투표용지 부족 때문에 투표를 하려 했는데 참여 못한 사람들이 산술적으로 최대 얼마나 되는지 그 수치를 파악해서 선거 결과를 바꿀 만한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언론이 이걸 지적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 센터장은 “서울시장은 (1, 2위 후보간) 표차가 몇만 표였기에 재선거를 한다고 해도 결과가 뒤집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초의회의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고 짚었다. 일각에선 관련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224조는 소청이나 소장을 접수한 선관위나 대법원·고등법원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때에 선거 전부나 일부의 무효 또는 당선 무효를 결정하거나 판한다고 규정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김준우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도 “(소송으로 이어질 경우) 투표를 못한 사람이 몇 명이냐는 기준을 정하는 것은 법원의 재량”이라며 “이에 따라 기초의회나 광역비례 의원 선거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동찬 위원장은 “기초단위 선거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이 누구든 법적 조치를 할 수 있고, 끝난 이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슈가 확 올라왔다가 잠잠해지는 것도 문제”라며 “제대로 보도하지 않으면 부정선거론의 불쏘시개로 쓰이는 소재만 될 뿐이다.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언론이) 짚을 건 짚고 잘못된 것을 보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선관위가 이번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본투표 용지 인쇄 기준을 '전체 선거인 수의 50%'로, 지난 지방선거 대비 10%p 낮춘 사실이 드러났다. 선관위 측은 언론에 그간 남은 투표용지를 두고 부정선거에 활용하거나 탈취하려는 위협이 반복돼 잔여 투표용지를 줄이려 했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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