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독립은 있는데 책임은 왜 없나 [쓴소리 곧은소리]
반복되는 부실 논란, 이제는 조직과 인사를 수술할 때다
(시사저널=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선거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실상 긴급사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6·3 지방선거 당일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현장 실수를 넘어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전국 17개 투표소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국민적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재선거 사유는 아니다"고 설명했지만, 많은 국민은 2022년 대선 당시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지금 국민이 느끼는 불안은 단순히 투표용지 몇 장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다. 참정권 제한이라는 헌법적 문제를 넘어 "선관위라는 조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과연 정치적으로 독립된 기관인가" "책임지는 사람은 존재하는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조직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부정과 부실은 다르다. 부정은 고의이며 범죄다. 반면 부실은 무능과 관리 실패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반복되는 부실은 결국 부정에 대한 상상과 의심을 키운다. 신뢰가 무너지면 민주주의의 결과 자체가 흔들린다. 선거는 실제로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국민이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다. 선관위 조직 전반에 누적된 구조적 문제의 폭발에 가깝다.

독립기관인가, 무풍지대인가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국민이 던지는 질문은 다르다. "독립은 있는데 책임은 왜 없는가." "세금은 쓰는데 국민은 보이지 않는가."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외부 감시와 경쟁이 약화되고, 조직 내부의 폐쇄성이 강화되며, 인사 검증과 책임 추궁이 느슨해졌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채용 비리 논란, 가족 특혜 의혹, 내부 승진 중심 문화, 폐쇄적인 순환 구조는 선관위가 '국민의 조직'이 아니라 '자기 보호형 조직'으로 변질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키워왔다. 결국 이번 사태는 "누가 선거를 관리하는가"와 동시에 "그들을 누가 검증하는가"의 문제다.
선거 관리의 핵심은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채용되고, 어떤 기준으로 승진하며, 어떤 가치관으로 조직을 운영하느냐에 따라 선거의 신뢰 수준은 완전히 달라진다. 따라서 선관위 개혁은 장비나 규정을 일부 손보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조직과 인사의 근본적 혁신이 병행돼야 한다.
첫째, 채용 구조를 전면 개방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폐쇄적 채용 구조로는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선거 행정은 일반 행정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공공성과 윤리성이 요구된다. 일정 직급 이상은 공개 경쟁 체제로 전환하고, IT·보안·통계·물류·위기관리·감사 분야의 민간 전문가와 외부 경력자를 적극 영입해야 한다. 오늘날 선거는 단순한 서류 행정이 아니다. 디지털 보안, 데이터 검증, 실시간 운영 체계, 여론 대응까지 포함된 초정밀 국가 시스템이다. 외부 해킹과 조작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고려하면 AI 시대에 걸맞은 전문성과 기술력이 필수적이다. 그런데도 과거식 순환 보직 중심의 행정 조직으로 운영된다면 국민 신뢰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둘째, 정치적 중립성을 구조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렀다. 이제는 중립성을 제도와 시스템으로 증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요 선거 관리 책임자 임명 과정에 여야 추천과 민간 검증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정 성향이나 특정 인맥 중심의 인사 구조가 반복된다면 국민은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필요하다면 정치권의 직접적인 임명권 자체를 최소화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선관위 고위직의 정치권 직행, 정당 연계 활동, 퇴직 후 정치 참여 등에 대한 엄격한 제한도 필요하다. 정치적 독립은 선언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셋째, 책임지는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 지금 선관위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 소재가 흐려진다는 점이다. "유감이다" "사과한다"는 말은 반복되지만 누가 무엇을 잘못했고 어떤 책임을 졌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핵심 기관일수록 오히려 더욱 엄격한 책임 체계가 필요하다. 투표용지 부족, 개표 오류, 관리 실패와 같은 중대 사고가 발생하면 실무 책임자부터 지휘 라인까지 평가와 인사에 직접 반영되어야 한다. 반복적 사고가 발생할 경우 자동 감사와 직무 배제까지 이어지는 체계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독립기관은 권한만 강한 조직이 아니라 책임도 가장 무거운 조직이어야 한다.
국가 단위 인사 검증 체계도 검토해야
장기적으로는 선관위 채용을 독립적으로 검증할 국가 단위 인사 검증 체계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거 반복된 채용 논란의 본질은 결국 "누가 누구를 뽑는가"의 문제였다. 선거를 관리하는 조직이 스스로를 검증하고 스스로를 채용하는 구조는 국민 신뢰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공공기관 채용은 별도의 국가 인재 검증 체계와 연계해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방향도 검토할 만하다. 특히 선관위 같은 민주주의의 핵심 기관은 일반 기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윤리성과 독립성이 요구된다. 선거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다. 선거는 단순히 표를 세는 기술이 아니다. 국민이 국가 시스템을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투표용지 한 장의 부족은 종이 몇 장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신뢰에 생긴 균열이다.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민주주의의 비용은 급격히 증가한다.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극단적 갈등과 정치적 분열로 향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문제 없다"는 해명이 아니다. 국민은 이제 선관위가 정말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 조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책임 구조를 바꾸고, 정치적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다. 그렇다면 헌법기관답게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 투명성, 책임성을 보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부분적 개선이나 미봉책이 아니다. 선관위 운영 체계 전반을 원점에서 재설계하는 수준의 혁신이다. 그리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 선거 관리 전반에 책임이 있는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에 대한 법적·도의적·인사적 책임 또한 분명하게 뒤따라야 한다. 민주주의는 신뢰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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