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세던 희빈 장씨도 내 품에서 쉬고 있지요" [느린 등산 봉산(서울둘레길 16코스)]

신준범 2026. 6. 5.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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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과 경기 고양의 경계, 봉산(209m)과 앵봉산(235m)의 나지막한 속삭임
서울 은평구 봉산 정상에서 본 북한산. 창간 57주년 기념 '느린 등산 숲해설'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화려한 경치에 환호하고 있다.

산은 느리다. 수만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숱한 계절을 살아냈다. 산에서 서두르는 건 사람뿐이다. 남보다 빨리 오르고, 더 비싼 장비를 사용하고, 더 많은 산을 인증하고, 더 효율적으로 하루를 채우려 한다. 산에서조차 남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비교의 덫이 마음을 옥죄어온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앞만 보고 걷다 보면 정작 산이 건네는 가장 중요한 감각들은 스쳐 지나간다. 걸음을 늦추면 비로소 숲의 표정이 보인다. 같은 초록이라 믿었던 잎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을 품고 있고, 발밑의 흙은 마른 곳과 젖은 곳마다 냄새가 다르다.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하며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고, 바람은 순간마다 다른 온도로 피부에 내려앉는다. 느리게 걷는다는 건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감각의 문을 다시 여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너무 오래 결과 중심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몇 개의 봉우리를 올랐는지, 얼마나 대단한 풍경을 찍었는지가 산행의 가치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산은 원래 경쟁의 장소가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도착하는 사람보다,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자연의 지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작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느린 등산은 무너진 나를 회복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몸의 건강을 위해 산을 찾으면서도, 정작 거칠어진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던가. 속도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복잡했던 생각은 숲 사이로 흩어지고, 내 안의 소음은 계곡물에 씻겨 내려간다.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산을 걷는 동안 잠시라도 온전한 나 자신으로 편안히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봉산입니다

서울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를 가르는 경계이자, 북한산에서 나고 자란 낮은 능선입니다. 흔히 네 부모는 저토록 대단한데, 넌 왜 그리 낮고 볼품없냐고 묻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멋있는 바위도, 깊은 골짜기도, 높은 정상도 없습니다. 어떤 곳은 8부 능선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부대끼며 어울려 사는 것이 좋습니다. 내 품에 사는 사람조차 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많지만, 나는 무명이 좋습니다.

어르신과 아이들 소리가 소중합니다

존재감이 없다 해서 품이 좁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멀리서 우러러보는 산이 아니라, 언제든 신발끈만 매면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니까요. 화려한 단풍이나 웅장한 눈꽃은 없어도, 새벽녘 동네 어르신의 가벼운 기침 소리를 받아주고 해 질 무렵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품어주는 매일의 일상이 내겐 더 소중합니다.

봉산 꽃잔디언덕에 선 '느린 등산 숲해설' 프로그램 참가자들. 뒤로 서울 최대의 편백나무숲과 팥배나무숲이 드러난다. 높이는 낮지만 볼거리는 적지 않은 봉산이다.

내 이름은 몰라도 괜찮아요

높고 험준한 산들이 삶의 도전을 가르친다면, 나는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낸 당신의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내 이름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삶이 조금 버거울 때, 아무 때나 찾아와 내 품에서 편히 숨 쉬다 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도성과 서해안을 잇는 통로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서울둘레길 16코스로 기억하고, 봉수대가 있었던 봉우리를 봉산(209m), 꾀꼬리가 많이 살았던 봉우리를 앵봉산(235m)이라 부릅니다. 수백년 동안 봉수대는 서해안에서 오는 소식과 도성의 안녕을 연결하는 거대한 통로였습니다. 변방의 위기부터 평화의 소식까지, 나라의 운명이 담긴 불꽃을 가슴으로 품어 안았던 기억이 아직도 내 능선마다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도 참 애썼다

시대가 흘러 봉수대의 불꽃은 꺼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긴급한 전쟁의 소식이 아니라, '오늘도 참 애썼다'고 다독이는 바람의 소식,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다정하게 건네는 숲의 소식입니다. 꾀꼬리 소리 싱그러운 앵봉산의 숲길을 지나 봉산의 나지막한 능선에 오르면, 숨 가쁜 도심의 소음은 어느새 아득해집니다.

팥배나무와 편백나무가 있어요

내 몸에는 팥배나무가 자라고, 편백나무가 숲의 향을 더합니다. 봄이면 팥배나무가 하얗게 피어나고, 가을이면 그 열매가 새들의 몫이 됩니다. 편백나무는 산불이 났던 자리에 1만3,000그루를 새로 심으면서 생겼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큰 편백숲이라고들 해요. 숲은 사람들의 어깨를 조금씩 내려놓게 하지요. 누구는 그 향을 피톤치드라고 부르고, 누구는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냄새라고 말합니다.

서울 둘레길 16코스는 서울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를 가르는 산줄기인 봉산을 따라 이어진다. 들머리인 증산체육공원에서 600m쯤 가면 닿는 첫 번째 전망데크. 맞은편 백련산과 안산, 강 건너 관악산, 청계산까지 드러난다.

땅의 기억을 붙들고 있습니다

내 곁에는 증산동, 신사동, 구산동, 갈현동, 진관동이 있습니다. 증산동 이름은 시루처럼 생긴 뒷산에서 왔다고 전해집니다. 신사동도 내 이웃입니다. 새 절이 있던 자리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은평이라는 이름 역시 오래된 서울 북서부의 지리와 마을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지명들을 바라보며, 산이란 결국 땅의 기억을 오래 붙들고 있는 존재라는 걸 배웁니다.

장희빈도 내 품에 누워 있지요

앵봉산 자락에는 다섯 기의 왕릉이 모여 있는 서오릉西五陵이 있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을 비롯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장희빈의 대빈묘도 내 품에 누워 있지요. 한 시대의 절정에 섰다가 가장 가파르게 추락했던 이들의 뜨거웠던 욕망과 회한도,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그저 고요한 솔바람 소리로 흩어질 뿐입니다. 산 아래 세상의 그 어떤 영욕도 결국은 이 푸른 숲이 품어 안아야 할 흙 한 줌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오릉의 붉은 홍살문과 능선을 흐르는 소나무는 묵묵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쉬게 할 따뜻한 언덕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오실 때만큼은 세상의 속도에 지친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던 봉수대의 불꽃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걷던 왕가王家의 숨결도 모두 이곳에서 평온한 휴식을 찾았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뒤처져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수백 년 전 그랬듯, 오늘도 삶의 무게에 지친 당신이 찾아와 마음의 안부를 묻고 갈 수 있는 따뜻하고 넉넉한 언덕으로 남고 싶을 뿐입니다.

산행 주의점

- 6호선 증산역 3번출구로 나와서 240m를 직진해 서울둘레길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증산체육공원에 닿는다. 2번출구로 나와서 불광천을 따라 걸으면 땡볕이지만 더 운치 있다.

- 서울둘레길 인증스탬프는 증산체육공원과 앵봉산가족캠핑장에서 구파발역으로 가는 길에 있다.

- 화장실은 증산역 역내 화장실을 비롯해 증산체육공원, 봉산전망대(신사동· 편백나무숲), 서오릉고개, 구파발역에 있다.

- 편의점은 증산역, 구파발역 외에는 둘레길 상에는 없다.

- 꽃잔디 언덕은 숭실고교 뒤, 편백나무숲 부근에 있다.

- 서오릉고개는 생태통로가 있어 아스팔트도로를 밟지 않고 앵봉산 산길로 연결된다.

- 곳곳에 은평구 방면 하산길이 있어, 체력에 맞게 중도 하산이 가능하다.

- 서오릉고개부터 시작되는 앵봉산 구간은 16코스에서 가장 가파른 난코스다. 30여 분만 오르면 완만해지므로 큰 산 산행에 비하면 쉽다. 다만 전반적으로 잔잔한 오르내림이 있어 너무 쉽게 생각하면 어려울 수 있다.

- 앵봉산 가족캠핑장을 지나면 대로가 나온다. 버스는 여기서 타야 한다. 횡단보도를 지나 200m를 가면 구파발역에 닿는다.

- 이정표와 서울둘레길 표지기가 있어 대체로 길찾기는 쉽다.

교통

6호선 증산역에서 시작해, 3호선 구파발역에서 끝난다. 중도 하산시 경로에 따라 새절역, 응암역, 구산역, 연신내역을 이용할 수 있다. 서울둘레길 16코스는 증산역에서 서오릉고개까지를 16-1코스, 서오릉고개에서 구산역까지를 16-2코스로 세분화해 나누기도 한다. 서오릉고개에서 마칠 경우 702A, 702B, 707번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갈 수 있다. 6호선 구산역, 3호선 녹번역, 5호선 서대문역, 1~2호선 시청역 등을 경유한다.

맛집

구파발역 일대는 재개발되어 오래된 맛집은 드물다. 신도시 분위기다. 대형 쇼핑몰인 은평롯데몰이 있으며 다양한 식당이 입점해 있다. 애슐리퀸즈 롯데몰점은 평일 점심 1인 1만9,900원 뷔페이며, 주말 점심은 2만7,900원. 24시간 영업하는 전주콩나물국밥은 접근성이 좋고 가성비 있다. 콩나물국밥(5,900원).

버스로 3정거장 (5~10분)만 가면 연신내역이다. 일대에 연서시장을 비롯해 산꾼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 많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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