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남태령을 메운 연대의 공기

임지영 기자 2026. 6. 5.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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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21일, 체감온도 영하 20℃를 밑돌던 혹한의 밤 이후 남태령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남태령〉은 그 밤, 28시간을 돌아본다.
5월19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남태령>의 김현지 감독. ⓒ김흥구

서울시와 경기도 과천시 사이에 위치한 남태령은 해발 183m의 고개다. 2024년 12월21일, 체감온도 영하 20℃를 밑돌던 혹한의 밤 이후 남태령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남태령의 기적, 남태령 전투, 남태령 대첩 등 부르는 말은 다양했다. 5월20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남태령〉은 그날 밤, 광장이 되었던 남태령의 28시간을 돌아본다. 영화 초반 흘러나오는 자막처럼 ‘동짓날 밤 우연한 광장에 대한 기록이자 그 하룻밤의 광장이 바꾼 것들에 대한 증언이고 남태령을 일상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의 분투기이다.’

시작은 ‘남태령에 농민들이 갇혔다’는 트위터(현 엑스·X) 글이었다. 닷새 전, 농민들이 꾸린 ‘전봉준 투쟁단’이 경남 진주와 전남 무안에서 각각 트랙터를 끌고 출발했다. 윤석열 체포와 구속을 촉구하기 위해 상경하는 길이었다. 서울 진입 과정에서 경찰이 차 벽을 치고 시위대를 막자 현장에서 농성이 벌어졌다. 청년 농업인 김후주씨가 올린 경찰의 대응 영상이 SNS에 빠르게 확산되면서 시민들이 남태령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롱패딩을 입은 2030 여성들이 남태령역에서 하차했다.

〈남태령〉은 〈어른 김장하〉로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받은 김현지 MBC 경남 PD가 만든 두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다. 내란 당시 그는 자사 유튜브 채널 ‘엠키타카 MKTK’에서 ‘뉴스파다’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12월16일 경남 진주에서 출발한 동군 트랙터를 취재했다. 윤석열이 취임 이후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첫 번째 거부권을 행사한 데 이어, 2024년 서울 전국농민대회에서 농기계를 트럭에 싣고 간 진주의 청년 농민 김재영이 구속됐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두고 만난 김현지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거의 (라이언 킹의) 심바가 잡혀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청년 농민이 얼마나 귀한가?” 불만이 들끓던 와중에 내란 사태까지 터졌다. 트랙터가 진주에서 출발할 때는 경찰이 에스코트까지 해서 ‘귀하게’ 모셨다. “서울 입구에서 막히는 걸 보고 농민의 흙 묻은 신발로는 서울을 못 가나 싶어 일단 빈정이 상했다. 농민들에 대한 탄압의 역사가 길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24년 12월21일, 경찰이 서울에 진입하려는 농민들의 트랙터 행진을 막으며 남태령은 광장이 되었다. ⓒ시네마달

결과는 전혀 달랐다. 판은 농민이 깔았지만 자리의 주인은 훨씬 다양한 얼굴들이었다. 이 영화의 주요 출연진은 트위터리안이다. 타고난 집순이지만 내란 이후 광장을 향할 수밖에 없었던 트위터 닉네임 ‘내향인 깃발 기수’, 경남에서 활동하는 퀴어 페미니스트 노동자 ‘퀴어 유기체 아저씨’, 청년 농부 ‘향연’, 트위터 시민정론지 ‘에스텔 뉴스계정’ 운영자 등 당시 남태령 현장을 지키고 전했던 이들이다. 김현지 감독이 ‘새로운 인류’라 명명한 이들이기도 하다. 지하철 막차가 끊길 때까지 경찰 차 벽이 치워지지 않자 심야 농성이 이어졌다. 준비 없이 맞이한 밤샘 농성, 막막한 시위대 앞에 푸드 트럭이 다가왔다. 시민들이 선결제한 닭죽, 유자차와 토스트도 속속 도착했다. 생리대, 핫팩, 보조배터리 같은 후원 물품에 이어 난방 버스가 등장하며 고개 일대는 거대한 광장이 되었다.

“서로를 돌보고 싶어서 안달 났던 순간”

2만여 명이 실시간으로 시위를 지켜보던 그 밤, 김 감독도 밤새 트위터와 온라인 생중계로 남태령 현장을 ‘겪었다’. 평소 고민했던 지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우리끼리 왜 맨날 싸우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세대 갈등이나 남녀 갈등, 지역 갈등 같은 게 정말 본질적인 갈등인지, 혹시 그 뒤에 계급 갈등이 가려져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데 전혀 소통하지 못할 것 같은 농민과 2030 여성 청년 사이의 벽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걸 봤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김현지 감독은 그날 밤에 본 트윗 하나를 기억했다. ‘농민들이 엄청 강하고 무서운 분들인 줄 알았는데 차가 끊겨도 우리가 옆에 있겠다고 하니 구석에 가서 막 우시더라. 얼마나 외로웠는지 깨달았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독을 알아본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인가. 누가 나의 고독을 알아봐줬을 때 그 사람에게 온전히 기대고 싶고 고맙고 그런 마음들, 그게 농민과 청년들 사이의 벽을 순식간에 허문 게 아닌가 싶다.”

당시의 트윗을 시트로 정리한 후 인터뷰이를 고르고 트위터 DM으로 기획서를 보내 섭외를 시도했다. 현장과 트위터라는 이중 광장이 어떻게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게 되었는지, 광장 이전과 이후 본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취재 과정에서 김현지 감독은 본인이 ‘완벽한 기성세대’라는 걸 실감했다. 한 출연자가 자신은 디스코드(음성 채팅 중심의 메신저)로만 소통한다고 했는데 그런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인터뷰이의 이름, 나이, 직업을 묻는 걸로 취재를 시작하던 그로서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이들을 취재하고 이들에게 배우고 싶으면 이들의 규칙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남태령 집회 현장에서 농민과 청년이 만났다. ⓒ시네마달

또 하나 어려움은 ‘출연자를 잘 보호할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다. 많은 출연자가 얼굴 드러내는 걸 힘들어했다. 사이버불링의 끔찍함을 잘 아는 청년, 여성, 소수자일수록 두려움이 강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 보호하기는 되게 힘드니까 최대한 사전에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다고 모자이크를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AI로 다람쥐 얼굴을 덧입힌 출연자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영화에는 감격적인 순간이 많이 담겼지만 내내 경쾌한 톤을 유지한다. 김 감독 스스로 비장하고 진지한 걸 못 참는 성격이다. 그날 남태령의 청년들도 그랬다. 실제 트위터 화면이 알림음과 함께 속도감 있게 뜨는 장면이 많아 그날의 남태령을 체험하는 기분이 든다. “남태령이 뭔지 모르는 분도 정말 많은데 내가 느꼈던 충격을 조금이라도 실제처럼 전하고 싶었다.” 그날을 재구성한 영상은 온전히 시민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기록학 전문가는 남태령을 ‘시민이 기록 생산의 주체이면서 아카이빙의 주체로 등장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김 감독은 이렇게 추측한다. “세월호 때 국가 기록이 잠기는 걸 보지 않았나. 그래서 어떻게든 내가 이 진실을 기록하고 알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열망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 〈남태령〉의 백미는 시민들의 자유발언이다. 홍대에서 열린 오타쿠 파티에 참석했다가 소식을 듣고 급히 오느라 짧은 치마 차림을 한 여성, 한국에서 자란 중국인, 고졸 직장인, 전세 사기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 등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농민들에 대한 지지 발언을 했다. 각 집단의 의제를 경청하고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케이팝과 민중가요가 동시에 울려 퍼졌고 응원봉과 깃발도 한데 섞였다. 김 감독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싶어서 안달 났던 순간”이라고 당시를 정의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이 2024년 12월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고개에서 경찰과의 대치를 끝내고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이동하고 있다. ⓒ김흥구

영화에는 그 당시 널리 회자된 말이 나온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논바이너리(성별 정체성을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으로 규정하지 않음)’ 깃발을 들고 있던 ‘용주’가 “딸들, 수고했어”라는 격려의 말에 “저희는 사실 딸이 아니에요”라고 답하자, 상대 농민이 한 말이다. 부정당하지 않은 경험이 처음이라 감동받았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존재가 지워진 경험이 있는 이들이 공감하며 리트윗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대의 공기가 그날 남태령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김 감독은 말한다 “퀴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어딘가에서 배제당한 경험이 있다. 평소 같았으면 농민분도 그런 말을 안 했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돕기 위해 온 이들이다. 배우고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 거다.”

김현지 감독은 계엄 이후 시민들 자아의 범위가 확장된 것도 남태령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연대의 폭을 넓혔다는 해석이다. 〈어른 김장하〉의 연장선에서 남태령을 바라보게 되기도 했다. “김장하 선생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라고 했는데 실감이 잘 안 났다가 남태령에서 ‘작은 김장하’들을 잔뜩 보니 비로소 실감이 됐다.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만들 당시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위에 모셔놓고는 본인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있었는데, 남태령의 시민들을 보고서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깨달았다.”

남태령이 남긴 것, ‘말벌 동지’

영화에는 남태령 이후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동짓날 밤을 함께하며 서로의 동지가 된 그날 이후 투쟁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대하는 ‘말벌 동지’의 이야기다. 말벌 아저씨(인터넷 밈이 된 〈나는 자연인이다〉의 한 등장인물)처럼 재빨리 뛰어가 연대하는 이들이다. 느슨한 연대체인 말벌 동지는 소속이 없다. 소속 대신 가진 게 있다면 딱 하나, 투쟁장 ‘스티커’ 정도다. 영화는 대구 달서구 태경산업 투쟁 현장,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의 새해맞이 행사 등 주로 지역의 풍경을 다룬다.

남태령 시위 당시 트위터(현 엑스)로 실시간 정보가 오갔다. ⓒ시네마달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2022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당시 가로·세로·높이 1m 철제 감옥을 직접 용접해 스스로를 가두었던 유최안씨다. 만나기 전에는 굉장히 작은 줄 알았는데 덩치가 꽤 커서 놀랐다. “투쟁 당시 고독감 때문에 힘들었고, 노조 활동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하셨는데 이분이 자유롭게 웃는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말벌과의 만남이 그분들한테 행복을 줬구나 싶어 뭔가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연대는 영화 초반에 말한 ‘남태령을 일상으로 옮기려는 시도’ 중 하나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맨날 비장하게 투쟁만 하겠나. 낭만이 있어야 계속 견디고 오래갈 수 있는 거다.”

‘남태령’ 이후, 김현지 감독 개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나 스스로 변방의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촬영하면서 보니 너무 정상성의 길로만 걸어온 사람이더라. 그 깨달음이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우리 사회 정상성의 범위를 늘리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는 이번 영화를 ‘남태령 개론서’라고 말했다. 남태령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새 인류의 탄생’을 추적했지만 연대가 필요한 사업장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지는 못했다. “여러 다양한 싸움을 이야기하는 후속작이 곳곳에서 나올 테니 거기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5월18일 광주에서 〈남태령〉의 특별시사회가 열렸다. 김현지 감독 개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지난 내란이 각인시킨 구절이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김 감독은 말한다. “오래된 민주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가 나왔다. 그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았다. 두 민주주의가 손잡고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고 남태령이 그걸 의미하는 ‘동사’가 됐으면 한다.” 집회 이후 만들어진 ‘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는 회원을 접주라고 칭한다. 동학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동지회 접주들은 올해 서울퀴어퍼레이드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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