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철의 구매전쟁] ⑨ 한국 구매의 현주소

문수아 2026. 6. 5.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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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기능이 보이지 않는 경쟁력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기능이 보이지 않는 경쟁력을 만든다

한국 대기업의 임원 명함을 보면 재무, 마케팅, 인사, 전략, R&D 담당이 즐비하다. 구매 담당 임원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업 공시에도 구매 조직의 성과는 잘 보이지 않는다. 원자재 비용이 매출의 40~70%를 차지하는 식품ㆍ화학ㆍ바이오 제조업에서조차 구매는 여전히 경영지원 부문 산하의 ‘지원 조직’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한국 구매의 현주소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다르다. 피앤지(P&G), 유니레버(Unilever), 바스프(BASF) 같은 기업들은 구매 최고책임자(CPO, Chief Procurement Officer)가 CEO 또는 CFO에게 직접 보고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맥킨지가 40개국 300개사 이상을 조사한 결과, 글로벌 기업의 3분의 2(약 67%)에서 CPO가 CEO 또는 CFO에게 직접 보고하는 구조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기업과의 격차는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조직 구조와 투자 수준의 차이다.

▲구매 인재의 구조적 공백
한국 구매 기능의 가장 큰 문제는 인재 파이프라인이다. 국내 대학에 물류ㆍSCM 관련 과정은 일부 존재하지만, 원자재 시장 분석ㆍ선물 헤징ㆍ공급사 협상 전략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구매 전문 과정은 사실상 없다. 영국에는 세계 수준의 구매 전문 석사 과정이 있고, CIPS(Chartered Institute of Procurement and Supply)라는 왕립특허 기관이 레벨 2부터 레벨 6까지 단계별 직업 전문 자격을 180개국에 제공한다. 한국 대학교에는 이에 해당하는 구매 전문 학위 과정이나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사실상 없다.

결과적으로 구매 인재는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브라질 대두 시장을 이해하려면 직접 산지를 방문하고, CBOT 선물 가격을 매일 읽으며, 공급사 담당자와 수년간 호흡을 맞춰야 한다. 노하우는 문서로 전달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체화된 지식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의 순환 근무 문화가 이 지식 축적을 방해한다. 수년에 한번씩 보직을 바꾸면 구매별 전문성이 쌓이기 어렵다. 겨우 시장을 알만 하면 다른 부서로 이동한다.

글로벌 곡물 메이저 기업의 트레이더들은 한 구매 파트를 10년, 20년 다룬다. 대두만 30년 한 사람이 대두 시장에서 상대하는 트레이더다. 한국 기업 구매 담당자의 평균 재직 기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협상 테이블에서의 정보 비대칭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재 문제는 글로벌 공통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한국은 구조적으로 더 심각하다. 가트너(Gartner)가 111명의 CP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재 인재 수준에 자신감을 보인 응답자는 46%였지만, 미래 요구사항을 충족할 충분한 인재가 있다는 데 동의한 CPO는 14%에 불과했다. 글로벌도 인재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구매 전문 교육과정 자체가 없는 한국은 그 격차가 구조적으로 더 크다.

글로벌 벤치마크 기관 APQC에 따르면 글로벌 상위 25% 우수 기업의 구매 인력은 매출 10억 달러당 15명 이하로 전문화되어 효율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구매 인력이 전체 임직원의 평균 1.28% 수준을 유지해야 적정하다고 제시한다. 한국 대기업의 구매 인력 비율이 이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는 드물며, 그나마 있는 인력도 회사마다의 순환 근무 정책으로 전문성이 분절된다.

▲경영진의 인식 격차… 공급망은 최우선인데 구매는 지원 부서인가
여기서 한국 기업 경영에 깊이 박힌 역설이 드러난다. 포춘ㆍ딜로이트의 2025 CEO 서베이에 따르면 공급망 다변화(71%)와 원가 절감(42%)은 전 세계 CEO들이 꼽은 최우선 경영 과제다. Proxima의 조사는 더 직접적이다. 프로지마(Proxima)의 2024 공급망 바로미터(영ㆍ미ㆍ유럽 4개국 3000명 CEO, 전업종 기준)에 따르면 원가 절감은 CEO의 99%가 최우선 과제로 꼽는 항목이다.

그런데 그 원가와 공급망을 실제로 다루는 구매 기능에 대한 투자는 어떤가. 해킷 그룹(Hackett Group)의 2024년 조사에서 구매 조직의 업무량은 8% 증가가 예상됐지만 예산 증가는 고작 1.6%에 그쳤다. 원가 절감은 99%의 CEO가 최우선이라면서, 원가를 실제로 움직이는 구매 기능에는 투자를 아끼는 것이다. 이것이 경영진의 인식 격차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모순이다. 한국 기업에서 이 모순은 글로벌 평균보다 훨씬 심하다.

숫자가 이 인식의 오류를 더 분명히 드러낸다. 맥킨지에 따르면 제조업 기업의 외부 조달 비용은 매출원가의 50~80%를 차지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전략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로지마와 영국 싱크탱크 경제경영연구소(Cebr)의 공동 조사는 더 구체적이다. 공급사 비용을 10% 절감하면 EBITDA가 평균 27% 증가한다. 매출 1조 원 규모 식품ㆍ화학사 기준으로 원자재비가 매출의 50%라면, 구매 단가를 1%만 낮춰도 연간 50억 원의 원가가 줄어든다. 이것이 구매의 레버리지다. 이 규모의 레버를 쥔 기능이 경영지원 부문 산하 팀에 머문다는 것은 전략적 판단 착오다.

구매가 실제로 하는 일은 더 넓다. 6개월, 혹은 그 이후의 원자재 가격을 예측하고 포지션을 설계하는 것, 지정학 리스크가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 공급사 네트워크를 관리해 위기 시 물량을 확보하는 것. 이것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이고 가치 창출이다. 1~8회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 2022년 러우전쟁 때, 중국 전력 부족과 인도 수출 통제가 겹쳤을 때 공급을 유지한 기업과 멈춘 기업의 차이는 구매 기능의 전략적 수준에서 갈렸다.

구매를 전략으로 보는 경영진은 다른 질문을 한다. “올해 얼마 깎았나”가 아니라 “우리의 공급망이 다음 위기에 얼마나 버틸 수 있나”를 묻는다. 이 질문의 차이가 구매 조직의 수준을 결정한다.

▲CPO 구조의 부재 : 독립적 구매 기능이 필요하다
많은 한국 기업에서 구매본부장이 CFO에게 보고하는 구조는 형식적으로 글로벌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맥킨지 조사에서도 글로벌 기업의 3분의 2가 CPO를 CEO 또는 CFO에게 직보하는 구조로 운영한다고 답했다. 문제는 보고 라인의 형식이 아니다. 그 보고 라인이 만들어내는 성과 기준과 의사결정 문화다.

CFO 조직 산하의 구매는 재무 지표로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 “올해 얼마 깎았나”가 구매의 언어가 되고, 공급망 안정성ㆍ리스크 관리ㆍ전략적 가치 창출은 측정하기 어려운 부차적 과제로 밀린다. 예산 결정은 재무 기준에 종속되고, 공급사 선택은 단가 우선 논리로 수렴한다. 그 구조 안에서 구매는 전략이 아니라 집행이 된다.

글로벌 선진사와 한국 기업의 진짜 격차는 보고 대상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글로벌 선진사의 CPO는 CFO나 COO에게 보고하더라도 C-레벨 독립 임원으로서 이사회에 접근하고, 구매 전략을 독자적으로 설계하며, 공급사 선택과 계약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 McKinsey 조사에서 글로벌 선진사의 절반 이상이 이미 구매 분석과 원가 모델링을 중앙화하는 Center of Excellence(CoE)를 구축했고, 3분의 2가 전략적 구매와 트랜잭션 구매를 명확히 분리 운영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서 이 두 가지 구조적 조건을 갖춘 사례는 극히 드물다. C-레벨 직함, 의사결정 권한, 이사회 접근성 세 가지가 모두 다르다.

딜로이트는 12년 연속 CPO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구매가 경영 테이블에 자리를 얻었는가.” 글로벌 선도 기업에서는 이미 답이 굳어지고 있다. CFO 직보라는 형식은 갖추고 있는 한국 기업들조차도, 구매가 진정한 전략 기능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불분명하다.

▲한국 구매가 가야 할 방향
한국 구매 기능이 업그레이드되려면 세 가지가 바뀌어야 한다.

첫째, 전문성의 심화다. 순환 근무를 줄이고 구매와 카테고리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 대두 전문가, 팜유 전문가, 화학 원료 전문가, 설비 구매 전문가가 적어도 10년 이상 해당 시장을 깊게 파는 구조, 그 조직 안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이 글로벌 메이저와의 협상에서 정보 비대칭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둘째, 디지털 역량의 내재화다. AIㆍ기상 데이터ㆍ위성 이미지를 구매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딜로이트 2025 CPO 서베이에서 상위 구매 조직(Digital Masters)은 예산의 최대 24%를 구매 기술에 투자하며, 이는 2023년 대비 두 배에 달한다. 가트너(Gartner) 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구매 리더의 98%가 데이터 분석ㆍ자동화ㆍAI 등 기술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데이터를 읽고 해석하는 역량이 구매 전문가의 기본 소양이 되어야 한다. 물론, 데이터는 판단의 재료이지 판단의 대체재는 아니다.

셋째, 구매를 비전 있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구매는 부담만 크고 보람은 적은 부서라는 인식이 조직 내부에 퍼져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기업의 경우 수조 원의 원자재를 다루고, 글로벌 공급망을 설계하며,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구매의 일이다. 역할이 크고, 보람이 있으며, 성장이 보이는 곳에 좋은 사람이 남는다. 구매 전문 인재를 장기적으로 육성하고, 성과에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며, CPO와 최고 경영진을 목표로 성장할 수 있는 커리어 경로를 만드는 것이 조직의 책임이다.

그러나 비전 있는 구매 조직은 인재 육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구매가 아무리 역량을 키워도 독립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역량은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구매 조직이 경영지원 부문 산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기능하고, 구매 헤드가 전략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CPO 구조를 갖추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경영진이 먼저 구매를 전략으로 정의해야 구매가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다.

32년 구매 현장에서 목격한 가장 강한 기업은 원자재를 가장 싸게 사는 기업이 아니었다. 위기 때 흔들리지 않는 공급망을 가진 기업이었다. 그 공급망을 만드는 것이 구매人, 구매 조직이다. 보이지 않는 기능이 보이지 않는 경쟁력을 만든다.

▶다음 회 예고 ⑩ 에필로그: 2030, 원자재 구매의 미래. 리쇼어링·프렌드쇼어링이 원자재 구매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AI 기반 구매의 전망과 한계. 한국 기업이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을 짚는다.

본 기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기업의 공식 입장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이야기는 필자의 링크드인 ‘구매단상’이나 브런치의 ‘구매자의 경영노트’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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