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초의 공안 조작’ 국회 프락치 사건…피해자 목소리 전한 ‘S의 비망록’

고경태 기자 2026. 6. 5.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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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 남쪽 잔류’ 서용길 전 의원 부인 비망록 첫 공개
“이승만이 지시한 조작 사건” 헌병대 고문 등도 기록
1958년 촬영된 서용길 전 제헌국회의원과 이영란 여사 부부의 가족사진. 맨 왼쪽이 둘째였던 서영철씨. 서영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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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지령받고 국회 프락치 했다는 어이없는 죄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소장파(의원을) 제거하(려)는 한민당과 이승만의 합작품이다. ‘S’(에스)는 위험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떳떳한 심경으로 대면했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 당시 가혹 수사와 조작 정황 등을 세밀하게 담은 기록이 뒤늦게 발견됐다. 이 사건으로 수감됐던 제헌의원 서용길(1912~1992)의 아내 이영란(1920~2013)씨가 남편을 ‘S’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삼아 적은 ‘비망록’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 지시에 따라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처벌된 일련의 사태로, 현대사에서 반복된 ‘용공 조작’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 사건을 구실 삼아 서 전 의원 등이 특별검찰관으로 활동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해체되며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역사도 이어졌다. 오는 6일은 반민특위 사무실이 경찰에 습격당해 해체의 길로 접어든 지 꼭 77년 되는 날이다.

서용길 제헌의원의 아들 서영철(74, 일창육영재단 이사장)씨가 4일 한겨레에 공개한 ‘비망록 반민특위’를 보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인한 구속과 한국전쟁 중의 석방, 1·4 후퇴 전 재구속돼 부산형무소로 이송되는 과정 등 1948~1950년 격동의 역사 복판에 선 서 전 의원의 경험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대학노트 25쪽 분량의 이 비망록은 아들 서씨가 어머니의 유품에서 최근 발견했다고 한다. 비망록이 쓰인 건 사건 40여년이 흐른 1993년부터 1996년까지이지만, 남편 곁에서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겪은 아내 이씨가 남긴 증언이자 역사 기록물인 셈이다. 서 전 의원은 당시 처벌당한 의원 13명 중 홀로 납북되거나 월북하지 않았다.

서용길 전 제헌국회의원의 부인 이영란 여사가 기록한 비망록의 일부 내용. 서 전 의원이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있을 때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가 구금되었다는 사실과 국회프락치 사건 의원들을 기소한 오제도 검사, 사광욱(史光郁) 판사의 이름이 나온다. 서영철 제공

당시를 생생하게 묘사한 비망록의 요지는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이승만이 밑의 사람들을 시켜서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는 조작 수사와 황당한 재판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가령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뒤 헌병대는 서 전 의원 은신처를 알던 이영란씨 오촌 동생 중호를 친부 앞에서 고문한다. “매달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중호 아버지는) 이 광경을 보고 중호야 알면 말해라고 애원했다. 중호 입에서 (은신처인) 명동 성모병원이 튀어나왔다.”

검찰이 국회 프락치 사건의 사실상 유일한 증거로 제시한 여성 간첩 정재한의 진술과 암호문서가 재판에는 현출되지 않은 상황도 전했다. “프락치 사건은 이북에서 정모(정재한) 여인이 비밀암호를 갖고 월남해서 의원들을 포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에선 정모 여인도, 그 암호문서도 볼 수 없었다.” 증인 정재한은 법정에 나오지 않은 채 별건으로 사형 집행됐다. 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의심을 받는 이유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물꼬를 바꾼 사건이지만, 그 조작 여부는 77년 동안 국가 차원에서 한번도 진실규명된 적이 없다. 현재 서영철씨를 비롯한 국회 프락치 사건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또 다른 유족들은 3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사건 조작 여부를 제대로 밝혀달라며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지난 4월27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서용길 전 국회의원과 이영란 여사의 아들인 서영철(일창육영재단 이사장)씨가 반민특위 및 국회프락치 사건을 기록한 어머니의 비망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을 쓴 김정기(86) 외국어대 명예교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 사회 민주주의 말살의 분수령이었다”며 “이 비망록은 진상을 밝히는 데 보탬이 될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반민특위기념사업회와 정의기억연대 등은 반민특위 습격 77주년을 맞는 6일 오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대강당에서 `반민특위 강제 해체 77년 기억 행사'를 연다. 5일엔 `반민특위 강제해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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