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부실 선거, 좌우 따질 문제 아니다”
“이번 사태를 좌우 진영 논리로 다루거나, 갈라치기 소재로 삼아선 안 됩니다.”
4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우성아파트 경로당) 앞에서 만난 대학생 정모(26)씨는 화가 나 있었다. 투표소가 설치된 이 아파트에 사는 정씨는 제9회 지방선거 본투표가 진행된 전날부터 밤새 투표소 주변을 지켰다고 했다. 이곳에는 뚜껑을 열지 못한 투표함 2개(약 2000표)가 개표장으로 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전날 이 투표소를 비롯해 서울·인천·경기 지역 투표소 10여 곳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한때 중단됐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들어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며 투표함 이동을 막아선 것이다. 정씨는 “투표용지가 모자라 유권자가 투표를 못 하고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며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게 치러졌다는 사실에 답답하고 잠이 오지 않아 밤새 투표소 주변을 맴돌았다”고 했다.

최근 수년간 부정선거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행동에 나선 사람은 정치인이나 정치색이 짙은 인플루언서,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투표소에 모인 사람들은 평범한 시민이 더 많아 보였다. 본지가 잠실7동 2투표소 앞에서 만난 상당수 시민은 일부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모습이었다. 3일 밤늦게 일부 유튜버 등이 가세해 “투표소 안으로 진입하자”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자, 상당수 아파트 주민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선동하지 말라”며 자제시켰다.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번 사태로 투표권이 침해됐다며 선거 절차의 공정성을 문제 삼았다. 밤새 잠실7동 2투표소 앞을 지켰다는 하희준(27)씨는 “어제 오전에 투표를 마치고 집에 갔다가 밤늦게 소식을 듣고 다시 나왔다”며 “일부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있지만 ‘투표하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많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벌어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우성아파트 주민 백모(23)씨는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만큼 준비하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며 “작년 송파 대선 투표율이 80%를 넘었고, 이번 지방선거 투표율도 과거 선거 때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예측이 많았는데도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의 50%만 준비했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고 했다. 시민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먼저 알려지고, 선관위는 사태가 발생한 지 한참 지난 4일 0시에 긴급 위원회를 연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 시민은 “선관위가 사태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중단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잠실7동 2투표소 앞에는 한때 300여 명이 모였다. 하지만 4일 아침에는 100여 명 수준으로 줄었다. 학교에 가거나 출근하기 위해 자리를 떠난 시민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이후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4일 저녁때쯤엔 600여 명이 투표소 입구를 둘러싸고 시위를 이어갔다. 이들은 투표소 건물 앞에서 “개표 중단” “선거 무효” “선관위 해체” 등을 외쳤다. 이 과정에서 일부 몸싸움도 벌어졌지만 큰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찰은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잠실7동 2투표소에 경찰관 470명을 배치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평범한 시민에게 민주주의의 요체인 선거의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민들은 절차적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강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당국은 이번 사태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이를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의 의구심을 해소해 줘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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