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으로 읽는 빛] 2-3. 한 표에 닿기까지-시각장애인 투표 동행 취재
중증 시각장애인 사전투표
관외용 '점자형 투표보조용구' 無
타인에게 지지후보 기호 알려줘야
사무원 지켜보는 앞에서 투표 치러
시각장애인 부부의 당일 투표
오늘은 투표 수월…현장따라 달라
비밀투표·사전 정보 접근권 숙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정책 필요
거소투표 택한 시각장애인들
“누구 찍었는지 다 아는 현장투표
가족 맡기는 게 나아…환경 개선을”


지난달 30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학익2동 행정복지센터 1층 사전투표소.
중증 시각장애인 한혜경 씨는 다른 유권자들이 투표를 마치고 돌아갈 때 안내견과 함께 20분간 제자리에 멈춰 서 있어야 했다. 서울 강서구에 주소를 둔 관외 선거인인 한 씨가 사용할 수 있는 점자 투표보조용구가 투표소에 단 한 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투표관리관과 투표사무원들은 예상치 못한 한 씨의 방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한 씨는 먼저 "혹시 인천에서 사용하는 투표보조용구라도 빌려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뽑고자 하는 후보의 정당명과 기호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인천의 보조용구와 서울의 투표용지 칸이 맞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투표를 마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일례로, 서울시의원 비례대표 투표용지에는 17개 정당명이 담겼지만, 인천시의원 비례대표 투표보조용구에는 12개 정당이 담겨 칸 간격과 길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규격이 맞지 않는 용구를 고집하다간 인주가 칸 밖으로 번지거나 다른 후보 칸에 잘못 기표될 가능성이 컸다.
사전투표를 포기할 것인가, 비밀투표를 포기할 것인가. 이대로 발길을 돌리면 본투표일에 집 근처 투표소로 가야 했고, 지금 투표하려면 결국 누군가에게 자신이 택한 후보를 알려줘야 했다.
고심 끝에 한 씨는 투표관리관을 포함한 두 명의 사무원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소리 내지 않고 손가락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기호를 보여주면, 이들이 인주를 든 한 씨의 손을 해당 칸으로 옮겨주는 방식이었다. 비록 헌법이 보장하는 비밀투표의 권리는 지켜지지 못했지만, 현장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투표소를 나온 한 씨는 "투표소 문을 열고 들어갈 때부터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고 씁쓸했던 순간을 돌아봤다.
그러면서도 한 씨는 현장 사무원들의 태도를높이 평가했다. 그는 "보통은 대리 기표를 할 때 사무원들이 직접 도장을 찍고 접어서 투표함에 넣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선 내가 직접 도장을 누르고 투표지를 접을 수 있도록 차분하게 유도해 줬다"며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투표사무원들을 추켜세웠다.
시각장애인이 사전투표 현장에서 비밀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투표 결과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씨는 "현장 사람들을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내가 몇 번을 찍어달라고 한들 전맹인 나로서는 도장이 진짜 원하는 칸에 찍혔는지 절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극단적인 예로 특정 정당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무원이 기표소에 함께 들어간다면, 유권자 입장에서는 투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장애인단체들은 선관위에 지속적으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으나 행정의 벽은 완고하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를 비롯한 7개 장애인단체는 지난 4월 1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정책간담회를 열고 관외 사전투표의 구조적 문제를 정식 제기했다. 그러나 선관위는 행정적 한계를 이유로 "현실적으로 해결이 어렵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한 씨는 선관위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전국 모든 투표소에 수천 개 지자체의 점자 용구를 상시 갖추라는 뜻이 아니다"라며 "비장애인처럼 유권자가 사전에 신청하면, 선거 공보물을 배송할 때 관외용 점자 투표용구를 집에 함께 동봉해 달라는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후보자 수가 적은 대선이나 총선과 달리 지방선거는 단체장부터 광역·기초의원, 비례대표까지 후보군이 너무 다양해 생기는 문제"라며 난색을 표했다.
아울러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사전투표 시 점자 투표용구를 사전에 제공하자는 방안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논의된 사항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오늘은 괜찮았지만"…제도 개선은 여전히 숙제

투표일 당일인 3일 오전 10시. 시각장애인 부부인 이정호(가명)·최은영(가명) 씨도 활동지원사와 투표길에 나섰다. 평소 사전투표를 하다 일정상 본투표를 택했다는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며 집에서 약 5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계양구 계산1동 제2투표소(계산1동 중앙경로당)까지 취재진이 함께 이동했다.
투표소에 도착해 시각장애 유권자임을 밝히자, 신분 확인 절차 등을 거친 선관위 직원이 투표보조용구에 투표지를 끼워 전달했다. 투표지를 받아 든 은영 씨가 첫 번째 기표소로, 곧이어 정호 씨도 그 옆 기표소에 들어갔다.
이날 투표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3분. 이들 부부가 경험했던 이전 선거에 견주면 비교적 원활한 편이었다.
은영 씨는 "투표보조용구가 준비되어 있었고, 투표지와 투표보조용구도 바르게 겹쳐져 수월하게 투표할 수 있었다"며 "예전에는 투표지를 보조용구에 안 맞게 끼워주셔서 번호와 기표란이 일치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예전에 투표소에서) 5분, 10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관계자가 있기도 했다. 되레 저희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기도 했다"라며 "예전보다 나아졌다기보단 (시각장애 유권자 투표 절차에 대해) 오늘은 아는 분들이 계셨다 정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원활했던 이날 투표와 별개로 제도 개선 필요성도 언급했다. 정호 씨는 "절차상 시각장애인들의 비밀투표가 보장되는 건 아니라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상황에 따라 투표 보조하는 분들께 손으로 원하는 후보자의 기호 번호를 알려주셔야 하는 사례(사전투표에 참여한 혜경씨의 경우)도 있다"라며 "외국에서는 더 나은 방법 등을 도입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이와 함께 공보물로 제출하는 디지털 저장매체(USB)에도 점자뿐 아니라 (별도의 기기 도움 없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음성 설명도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정책 변화도 주문했다. 은영 씨는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랑 장애인 정책 등을 비교하게 되는데 사실 서울이 모든 면에서 구성이 좀 더 잘 되어있다. 아이를 키우면 이동이나 학습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데 이런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서비스 등이 개선되고 정책이 보완됐으면 한다"고 했다.
정호 씨는 "인천에서 장애인 콜택시를 시행하고 있는데, 시 예산별로 운영하다 보니 경기도나 서울 등과 통합으로 운행하는 게 쉽지 않다. 서울로 갔다가 다시 택시를 불러 인천으로 오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조금 더 이동하기 편리한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한다. 또 저희 같은 장애인 부부를 위한 정책들이 보다 많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수 차례 투표 끝에 선택한 거소투표…현장 투표의 한계
현장 투표 한계에 부딪혀 거소투표를 택하는 일도 있다.
지난주 집에서 거소투표를 했다는 시각장애인 오태훈(가명)씨는 "총선이나 지방선거 사전투표소는 내가 표를 던져야 할 선거구의 점자형 투표보조용구가 준비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어려움이 있다"며 "어느 곳에서나 편하게 투표할 수 있어야 하는 사전투표 본래 취지에서 시각장애인은 제외된 셈"이라고 짚었다.
과거 마음이 불편했던 본투표 경험도 덧붙였다. 그는 "함께 투표하러 간 딸이 '다들 아빠가 누구 찍었는지 알아'라고 하더라. 기표란 크기가 작은 탓에 내가 찍은 후보자 인근에 유독 인주가 많이 묻어 알아봤다"라며 "선거의 4대원칙인 비밀선거가 지켜지지 않은 기억"이라고 했다.
관계자가 갑작스레 기표소로 들이닥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태훈 씨는 "시각장애인 동행 여부에 대해 투표소마다 해석을 달리하곤 한다"며 "동의하지 않았는데, 기표소까지 들어와 투표를 보려고 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전했다.
공직선거법 157조 6항에 따라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결국 수많은 투표 경험 끝에 그의 종착지는 거소투표다.
그는 "거소투표가 제일 비밀보장이 잘 된다. 어차피 내 투표 결과가 보인다면 믿을만한 가족과 진행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며 "지난해 대선에 이어 이번 지방선거도 거소투표를 했다"고 설명했다.
시각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바람도 전했다. 태훈 씨는 "후보자 정보를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점자형 투표보조용구나 선거 방법 등 현재 문제점이 개선되어야 한다"며 "'너네 이렇게 해'라고 강제하는 건 맞지 않다. 실제 투표에 참여하는 시각장애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돼 나의 의사 표현 방법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안나·안지섭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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