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탄소중립, 기술보다 속도가 관건”… 시장 진입 문턱 낮춰야
혁신기술·속도전으로 빠른 시장안착 필요
LED교통신호등 국산화 이어 등명기 개발
기술공개로 LED 조명 산업 생태계 형성
에기연 캠퍼스 ‘신기술 테스트베드’ 활용
효율화 해법으로 건물 열원 전기화 제시
PBS 폐지에 따라 출연연 체질 개선 기회
퍼스트 무버 체제로 대전환 지혜 모아야

이준기의 D사이언스
정학근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에너지ICT연구단 박사
“탄소중립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우리에게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겁니다. 기술혁신과 속도전을 통해 탄소중립 기술을 빠르게 시장에 안착시키는 전략이 시급합니다.”
정학근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에너지ICT연구단 박사는 우리나라가 ‘탄소중립 기술 선도국’으로 속도감 있게 변모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2050년 탄소중립 실현 여부에 대해 “가능하다고 본다”고 잘라 말하며 “다만 혁신기술이 시장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긴 걸림돌을 어떻게 해소하고, 기술의 시장 진입 시기를 얼마나 앞당기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제 아무리 좋은 기술이 개발돼도 성능 검증, 실증, 인증, 표준, 실적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현 체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탄소중립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정 박사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요구하고, 유럽 중심으로 탄소국경세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탄소중립은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며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기술을 시장에 진입시켜야 탄소중립이라는 신산업을 선도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확고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연연 역할에 대해서도 “PBS 폐지에 따라 그동안 출연연에 맞지 않았던 ‘패스트 팔로워 옷’을 벗고, ‘퍼스트 무버 옷’으로 새롭게 갈아 입고 연구자들이 연구 본연의 재미를 만끽하며 국가·국민이 원하는 연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정부와 출연연이 신뢰를 바탕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담 = 이준기 IT과학바이오부 부장
◇백열등 대체한 ‘LED 교통신호등’ 개발… 상용화까지 난관의 연속
정 박사는 1998년 에기연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전기에너지 효율화 관련 연구에 뛰어 들었다. 30년 가까운 그의 연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연구성과를 꼽으면 ‘한국형 발광다이오드(LED) 교통신호등’일 것이다.
당시 신입 연구원였던 정 박사는 백열등 교통신호등을 LED로 바꾸면 소비전력을 90% 이상 절감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해 동료 연구원들과 의기투합해 기술 개발을 시작했다.
그는 “기존 백열등 신호등은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필터를 씌워 색을 내는데, 이 때 거의 80∼90% 가량의 빛 손실이 생겨 효율성이 매우 낮았다”며 “반면 LED는 단색광으로 원하는 색의 빛을 100% 효율로 구현하고, 10만 시간 사용할 정도로 내구성뿐 아니라 시인성이 좋아 에너지 절감과 교통안전 향상 등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면 교차로를 기준으로 기존 백열등 교통신호등을 LED 교통신호등으로 교체하면 10가구가 1년간 쓸 수 있는 전력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예측됐다. 기술 개발에 성공했지만, 실제 보급까지 갈 길이 멀었다. 이전에 없던 기술이었기에 상용화 문턱을 넘기 위해선 실증, 규격, 표준화, 인증, 양산, 보급 등 험난한 과정과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절실함 안고 ‘기술공개’ 결단… LED 조명산업 생태계 개척
정 박사는 LED 교통신호등의 상용화를 앞당기기 위해 기술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기술료를 받는 것보다 LED 교통신호등의 빠른 시장 진입과 확산이 더 절실했기에 기술 공개를 선택했다”며 “이를 계기로 많은 기업들이 LED 교통신호등 상용화에 나섰고, 2002년 월드컵 경기장 주변 도로에 시범 도입되면서 전국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술 공개를 통한 정 박사의 상용화 노력과 정부 정책에 힘입어 전국의 모든 교통신호등은 LED로 전면 교체돼 새로운 LED 조명 산업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 후로 해수부 요청으로 등대에서 쓰이는 ‘LED 등명기’ 개발도 주도했다. 그가 개발한 LED 등명기는 제주 우도 등대박물관에 전시돼 있을 정도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
그는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우도 등대박물관에 전시된 LED 등명기를 본 순간, ‘내가 사회에 기여하는 기술을 개발했구나’라는 감동과 보람, 뿌듯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흐뭇해 했다.

◇탄소중립 실현 열쇠, 기술보다 ‘속도’
LED 교통신호등 성공을 발판 삼아 정 박사는 건축물 에너지 효율화, 마이크로그리드(독립형 소규모 전력망) 및 분산에너지 등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연구에 역량을 집중했다.
우리나라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40% 감축하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국제사회에 약속했고, 지난해에는 2035년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53∼61%까지 추가 감축하기로 해 이행 부담이 더욱 커졌다.
정 박사는 정부의 NDC 감축 목표 달성에 대해 “가능하다. 다만 속도의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탄소중립은 전 세계적으로 아무도 해 본 적이 없는 굉장히 어려운 목표”라며 “목표만 설정해 놓고 기술개발 이후 시장 진입까지 최소 6∼8년 걸리는 지금과 같은 속도로는 결코 달성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술보다 속도가 탄소중립 달성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 박사는 “탄소중립 분야에서 새로 개발된 혁신 기술이 시장에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상용화 과정을 속도감 있게 지원하는 신속 추진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에기연 캠퍼스를 ‘탄소중립 테스트베드’로 활용
그는 산업 다음으로 탄소 배출이 많은 건축물의 탄소중립 실현 방안을 찾는 연구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연구원의 모든 건물을 시뮬레이션해 ‘디지털 캠퍼스’로 구축했다.
각 건물 내 에너지 효율은 높이고, 탄소 배출은 줄이기 위한 최적의 운전 알고리즘을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해 찾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건물 효율화 해법으로 ‘건물 열원 전기화’를 제시했다. 건물 내 저온열을 전기화해 전기 비중을 높여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 박사는 “건물 내 전기를 생산하는 전력원도 재생에너지 등 저탄소원으로 대체하는 ‘전원 믹스’를 병행할 때 실질적인 탄소감축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박사는 연구원이 개발한 혁신 기술이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도록 연구원 캠퍼스를 ‘탄소중립 신기술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고 있다. 개발된 기술을 연구원 캠퍼스에 적용해 성능 검증과 실증, 인증 등을 통해 시장 진입 가능성을 사전에 검증하고, 이를 연구원이 개런티하는 방식으로 기술의 신속한 시장 진입을 돕겠다는 전략이다.
◇남는 전기, 기차로 실어 공급… ‘에너지 트레인’ 제안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출력제한과 전력계통 병목 문제 해결 방안으로 ‘에너지 트레인’(Energy Train)이라는 이색적인 구상을 내놨다. 재생에너지 잉여전력을 대형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저장해 철도를 이용해 전력 수요지에 공급하는 개념이다.
정 박사는 “지방에서 남아도는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을 많은 비용과 주민 수용성이 떨어지는 송전망 구축 대신 철도망을 통해 수도권으로 옮겨 빠르게 공급하자는 것”이라며 “재생에너지 잉여전력 해소와 전력 부문 탄소배출 저감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는 촘촘한 철도망과 세계적 수준의 배터리 기술력을 앞세워 미국보다 더 빨리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게 정 박사의 주장이다.
그는 에너지 트레인이 많은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들고, 주민 반대가 심한 송전망 건설 공백기 동안 즉각적인 전력 공급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면서 “수원과 용인, 평택 반도체 클러스터에 에너지 트레인으로 6개월 가량 전력을 빨리 공급해도 공장 조기 가동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은 엄청나고, 전력 이송용으로 배터리 수요가 늘면 새로운 배터리 시장도 창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PBS 폐지, 출연연에 ‘절호의 기회’… 퍼스트 무버 체제로 대전환
정 박사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 폐지, 기타공공기관 지정 해제 등 출연연을 둘러싼 변화에 대해 “출연연 본연의 역할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동안 단기 성과와 과제 수주 경쟁에 내몰렸던 출연연의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고, 국가·사회 난제 해결을 위한 임무형 연구개발(R&D)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PBS 폐지로 출연연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고 그는 규정했다. 국가와 국민이 원하고 원하는 연구에 매진해 체감할 수 있는 성과 창출을 통해 국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고, 보답하는 출연연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파편화된 연구에서 벗어나 출연연의 강점인 중장기 대형·집단연구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과 경영진을 포함한 내부 구성원의 혁신을 주문했다.
정 박사는 출연연 연구 체제를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출연연이 주어진 답을 빠르게 찾아가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에서 완전히 탈피해 연구 다양성을 열어 두고 협력·융합하는 퍼스트 무버로 연구 시스템을 대전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정 박사는 집에서 자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새벽 일찍 연구실에 나와 즐겁게 연구했던 기억을 소개하며 “연구자는 연구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만족감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며 “내가 하고 싶은 연구와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연구를 조화롭게 조절해 성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출연연 연구자의 역할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준기 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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