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티스트 최나경 "기적처럼 다시 쥔 플루트, 무대가 부른 것 같았죠"
세계가 인정한 '플루티스트' 최나경
오른손 마비된 뒤
음악 못할까 좌절
결혼식·생일잔치…
작은 무대 거절 안 해
플루트는 천사의 악기
용기 주는 연주하고파

클래식계에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을 때 좁은 길을 뚫고 ‘13년 차 독보적 솔로이스트’로 살아남은 인물. 최나경(Jasmine Choi·43)이다. 그는 영국의 클래식 전문 플랫폼(신피니뮤직)이 모이즈, 랑팔, 골웨이 등 전설적인 거장들과 함께 ‘음악 역사상 최고의 플루티스트 10인’으로 선정한 유일한 한국인이다. 기술적 완벽함을 넘어 ‘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숨을 불어넣는다는 최나경을 만났다.
▷예원학교 시절, 대전에서 혼자 상경했죠.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예요. 주말에 대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갈 때는 내내 울었어요. ‘삶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그때 처음 알았죠. 그래도 음악이 순수하게 너무 좋았고, 배울 게 많으니까 여기 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을 떠나 사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인데 나는 10년 일찍 하는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니 버틸 수 있었죠.”
▷미국 유학,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고요.
“‘이미 프로 무대에서 협연하고 있고 성적도 좋으니 이대로만 하면 서울대 입학에 교수 자리도 문제없다’고들 했어요. 반대 이유가 그런 거라면 떠나도 되겠다고 판단했죠. 전 그냥 연주를 더 잘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커티스로 가서 ‘플루트의 전설’ 줄리어스 베이커 선생님께 배웠네요.
“교육법이 한국과 달랐어요. 뭔가를 여쭤봐도 별말씀 안 하셨어요. ‘내가 결정하면 내 음악이지, 네 음악이 아니다’고 하시는 거예요. 2년 반쯤 지나니까 저만의 색깔이 생기더라고요. 선생님은 제가 스스로 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주신 거였어요.”
▷열여덟 살에 원인 모를 오른손 마비가 왔다고요.
“오른손으로 연필 한 자루조차 못 들 정도였어요. 나중엔 왼손에도 마비가 오더라고요. 10명이 넘는 의사들이 하나같이 다른 길을 찾으라고 했죠. 믿고 싶지 않았어요. 제 인생에는 플루트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 나를 믿어준 사람은 저 자신뿐이었죠. 그때 다짐했어요. 기적처럼 다시 플루트를 잡게 된다면 평생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요. 6개월이 60년처럼 느껴졌지만, 악기를 다시 손에 쥐는 순간 감사함이 배가됐어요. 지금도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를 떠올리며 힘을 내요.”
▷빈 심포니를 나온 뒤 솔로의 길을 택했어요. 그 시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요.
“세상이 생각하는 성공의 잣대가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계기였죠.”
▷풀타임 솔로이스트로 전향한 초창기는 어땠나요.
“처음 솔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석 달 뒤 친구 결혼식이 있었어요. 그것도 공연이라는 생각에 기대됐어요. 동네 하우스 콘서트, 옆집 아주머니 생일잔치에서도 연주했죠. 크고 작은 공연에서 만난 연주자들이 저를 다시 불러주고, 관객이 소셜미디어로 연결되고, 그렇게 지금은 베를린, 런던, 빈에서도 공연하게 됐어요.”
▷연주 외에 유튜브 채널 운영, 플루트 케이스는 물론 악보 제작도 하는데요.
“텅잉, 순환 호흡, 드라마 OST 연주까지 플루트와 관련된 다채로운 콘텐츠로 2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모았어요. 제 마음속엔 장르에 대한 국경이 없어요. 좋아하는 노래를 노래방에서 불러보고 싶은 것처럼, 제게 와닿는 곡을 연주하는 거예요. 바이올린곡을 플루트로 연주하면 처음엔 사람들이 ‘이래도 되나?’ 했는데, 이제는 그 곡을 꼭 거쳐야 하는 레퍼토리로 꼽아요. 플루트 레퍼토리가 확장되는 데 기여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지난해부터 인디애나 제이컵스 음대 교수로도 활동 중인데요.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인디애나까지 매달 한두 번 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긴 출근을 하고 있죠.(웃음) 학교 측에서 1년 반 동안 계속 연락이 왔는데, 학생 정원을 6명으로 줄이고 스케줄도 배려해주겠다고 해서 결국 수락했어요. ‘더 큰 소리, 더 빠른 기술보다 처음 악기 케이스를 열었을 때 그 기쁨과 설렘을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학생들에게 말해요.”
▷평소 체력 관리가 중요할 텐데, 비결이 있나요.
“플루트를 부는 행위 자체가 유산소운동이에요. 복식호흡에 풍선을 계속 부는 것과 비슷한 공기량이 필요하니까요. 투어 중엔 요가 스트레칭을 자주 하고요. 가장 중요한 건 잠을 잘 자는 거예요. 아무 데서나 금방 잠들어서 시차에 관계없이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어요.”
▷플루트의 매력은 뭘까요.
“외로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라고 생각해요. 어느 문화에나 나무에 구멍을 뚫어 부는 악기가 있었고, 그 소리는 언제나 구슬프고 영혼을 건드리죠. ‘천사의 악기’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현대곡에선 기차 경적 같은 소리도 나와요. 반전 매력이 플루트를 더 흥미롭게 만들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나요.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감기 증세로 병원에 갔다가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죠. 그리고 한 달 후, 제가 일본으로 공연하러 가기 전날 밤 떠나셨어요. 어머니가 ‘공연은 꼭 하라’고 말씀하셔서 간신히 끝내고 귀국했죠. 그 뒤로 음악관이 달라졌어요. ‘내 음악으로 세상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세상의 모든 음악인은 음악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부름을 받은 것 같아요. 아름다운 음악으로 이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요.”
▷어떤 음악가로 기억되고 싶나요.
“사람들이 제 연주를 듣고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었으면 해요.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행복하게 살겠다는 선택, 많은 실망에도 계속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 말이에요. 돌아가신 어머니께 배웠어요.”
※인터뷰 전문과 평론은 아르떼 매거진 6월호로 만날 수 있습니다
조민선/허세민 기자 sw75j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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