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美·中 IT 패권 틈바구니서 국가 핵심 인프라 ‘독자 생존’ 선언
EU, 기술 자립 속도전 돌입
자체 클라우드 부양 승부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3일(현지시각) 반도체와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오픈소스 역량을 키우는 대규모 기술주권(Technological Sovereignty)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병원과 전력망, 국방, 금융, 정부 데이터처럼 한번 끊기면 국가 기능이 흔들리는 영역에서 미국·중국 기업에 깊게 종속된 구조를 줄이겠다는 산업안보 정책이다.
헤나 비르쿠넨 EU 기술주권 담당 수석부집행위원장은 3일 기자 브리핑에서 이번 계획이 디지털 역량을 키우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2024년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작성한 경쟁력 보고서는 EU가 디지털 제품과 서비스, 인프라의 80% 이상을 역외 공급자에게 의존한다고 진단했다. 비르쿠넨 위원장은 이 통계를 인용해 “우리가 쓰는 기술 가운데 80%가 유럽 밖에서 온다”며 유럽이 핵심 디지털 기술을 역외 공급자에게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집행위는 이 역외 공급자 의존도를 낮춰 외국 기업이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끊거나, 외국 정부가 법을 내세워 특정 데이터를 요구해도 유럽 사회가 멈추지 않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비르쿠넨 위원장은 “이 분야에서 역량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며 “의미 있는 성과는 일러야 2030년에야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국방·사법·보건·에너지·금융 같은 민감 영역에서 쓰이는 공공 클라우드 사업자에게 더 엄격한 데이터 독립성을 요구하기로 했다. EU는 미국 정부가 자국 클라우드 기업에 압력을 넣어 유럽 데이터를 가져가거나 서비스를 강제로 끊을 가능성을 안보 위협으로 여긴다.
근거는 2018년 제정한 미국 클라우드법이다. 이 법은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이 해외에 저장한 데이터를 국가 안보 명분으로 강제 제출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EU가 데이터 제출 명령을 거부할 경우 외부 명령으로 시스템 전체를 멈추는 ‘킬 스위치’ 기능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비르쿠넨 위원장은 이 클라우드법 때문에 앞으로 미국 기업이 EU에서 민감 영역에 필요한 기술 주권등급을 충족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EU는 앞으로 데이터 보관 장소를 넘어 기업 소유 구조, 역외 법률 회피 여부, 운영 통제권, 공급망 투명성까지 따져 민감 영역 사업자를 뽑을 예정이다. 그는 CNBC에 “유럽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데이터는 유럽에 저장되도록 확실히 조치하겠다”고 했다. 다만 그는 “EU가 고립을 택해 모든 것을 자체 생산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안보·사법과 관련된 민감 서비스와 데이터를 유럽이 통제하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U는 유럽 내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 5∼7년 안에 유럽 내 데이터센터 용량을 최소 3배로 늘리기로 했다. 환경 인허가를 빠르게 처리하는 구역을 별도로 마련해, 전력과 부지, 물, 자금 접근성까지 함께 개선할 방침이다.
반도체 관련 법안들도 수정했다. 역내 자동차 제조사들과 방위산업체, 공공기관이 유럽에서 만든 칩을 우선적으로 사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크게 틀었다. 2023년 제정된 기존 반도체법은 EU 차원에서 보조금을 뿌려 반도체 공장을 역내에 유치하는 데 집중했다. EU는 이후 520억유로(약 92조원)가 넘는 반도체 공장 투자를 끌어냈지만, 첨단 제조와 설계 영역에서는 여전히 미국·대만·한국·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당초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점유율을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걸었지만, 유럽은 여전히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비중이 10%에 그친다.
이번에 내놓은 개정안은 유럽 내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에 확실한 수요를 보장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제조사와 수요 기업을 EU가 직접 연결해 사전 구매 약속을 주선하고, 과잉생산 위험을 줄인다. HEC파리의 올리비에 다르무니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첨단 AI 칩 공장을 새로 짓기에는 시간상 현실성이 떨어진다”면서도 “지금 있는 유럽 내 공장에서 세계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D램과 메모리 칩을 생산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미국 소프트웨어에만 갇히는 잠금 효과를 막기 위해 공공 부문 오픈소스도 키운다. 정부 시스템은 한번 도입하면 수십 년을 가고 교체 비용이 크다. EU는 공공기관을 오픈소스 프로그램 초기 고객으로 삼아, 특정 외국 기업 독점 소프트웨어에 묶이는 구조를 줄이겠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과 독일 산업용 소프트웨어 SAP, 프랑스 클라우드 OVH클라우드와 AI 기업 미스트랄 등이 수혜 기업으로 꼽힌다.

이번 조치가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거세다. 아마존·구글이 속한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는 “신뢰할 수 있는 공급자를 배제해 유럽 이용자가 더 제한되고 질 낮은 서비스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파리 시앙스포의 레오나르도 콰트루치 디지털 정책 전문가는 EU가 미국·중국처럼 AI 전체 단계를 자체적으로 갖출 규모가 안 된다고 진단했다. 그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우면 대기업은 유럽이 아닌 다른 시장과 거래할 것”이라며 “EU는 무역 상대국에서 멀어지고, 유럽 이용자는 최고 성능 도구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패키지는 27개 회원국과 유럽의회 동의를 거쳐야 시행된다. 미국 빅테크에 사실상 불리한 내용인 만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돌아온 상황에서 통상 마찰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는 앞서 유럽의 지속적인 디지털 규제를 겨냥해 보복 조치를 거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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