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의 풍경동물] 너의 손에 묻힌 피

한겨레21 2026. 6. 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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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너희의 고기가 한국인의 식단에 익숙하던 시절이 있었지. 너희가 한반도의 산과 들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때였어. 어느새 사라졌구나. 어지간히 깊은 산에서도 너희를 만나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는 풍경은 어떤 건 오래 머물고, 어떤 것은 순식간에 달라진다. ‘토끼고기’는 어느새 오래된 책에나 등장하는 낱말처럼 여겨진다. 슬픈 일인지, 기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왕성한 번식력으로 사랑받고 똑같은 이유로 지탄받는 너희, 쓰다듬어봐야 비로소 아, 이게 토끼구나 알게 된다. 2018년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 중턱.

하고 싶은 일과 먹고사는 일 사이엔 강이 흐른다.

쓰고 싶은 것만 쓰는 글쟁이가 있을까. 있긴 하겠지.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는 그림쟁이가 있을까. 없진 않겠지. 찍고 싶은 것만 찍는 사진쟁이도 있을 거야, 어딘가에는.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니까 좋겠구나”라는 부러움 섞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하고 싶은 일만 해서는 먹고살 수 없는 처지이기에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먹고사는 문제만 없다면 마음껏 날개를 펼쳤을 것이라 한탄하면서도, 먹고사는 문제의 엄중함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임을 새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쓰고 싶지 않은 글이라도 그로써 밥을 해결한다면,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일지라도 그로써 잠자리를 마련한다면, 찍고 싶지 않은 사진일지라도 그로써 가족을 건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고 싶은 일과 먹고사는 일은 어긋난다. 슬며시 어긋나면 그나마 다행이요, 심하게 어긋나면 밀려오는 자괴감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일제강점기 지식인 현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작품이라 부를 만한 글을 쓰고 싶었으나, 먼저 밥이 되는 글을 써야만 했다. 쓰고 싶은 글만 쓰거나 먹고살 글을 쓰면서도 작품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밥글에 매달리며 작품까지 쓴다는 건 엄두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덜컥 가정을 꾸렸다. 고상한 아내를 맞았다. 줄줄이 자식마저 낳았다. 아내는 고정수입을 얻을 수 있는 신문 연재를 반기고, 현은 어쩔 수 없는 그런 현실을 탄식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재소설을 실어주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한다. 마지못해 쓰던 글마저 받아주던 매체가 사라지자 현은 망연자실한다. 때마침 아내가 넷째 아이를 임신한다. 해법이 무엇일까.

절치부심하던 현의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왕성한 번식력을 가진 토끼를 키우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일본이 만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토끼털과 가죽으로 만든 방한용품 수요가 늘던 때였다. 현은 가진 돈을 털어 토끼 스무 마리를 산다.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토끼는 나날이 수가 불었다. 급기야 사룟값을 대기 벅찰 지경에 이른다. (산) 토끼는 생각만큼 팔리지 않았다. 녀석들을 죽여 가죽을 내다 팔면 될 일인데, 죽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토끼 죽이는 방법을 책으로 공부하지만 손이 따라주질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토끼에 관한 글이라도 써야겠다 생각하는데.

보다 못한 아내가 나선다. 토끼를 죽여 가죽을 벗긴다. 현의 얼굴에 피 묻은 손을 내밀며 씻을 물을 가져오라 말한다. 죽은 닭의 목에 칼을 대는 것조차 두려워 신문지로 닭 머리를 가리던 아내였다. 그랬던 아내 손에 피를 묻힌 건 삶이라는 현실인가, 못난 남편인가. 현은 생각에 빠진다.

월북작가 이태준의 단편 ‘토끼 이야기’(1941)를 읽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 삶의 쳇바퀴를 떠올리게 된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은 기쁜가, 끔찍한가. 내 손에 묻은 피를 떠올리다가, 내가 남의 손에 묻힌 피에 대해 생각하다가.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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