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과학기술 AI 경쟁력, 슈퍼컴퓨팅 공동활용에 달렸다

인공지능(AI)은 이제 검색과 번역, 영상 인식을 넘어 과학기술 연구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았다. AI는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기후와 재난을 예측하며 차세대 배터리 소재를 설계한다. 대형 연구장비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과학적 가능성까지 제안한다.
이러한 변화는 연구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뜻한다. 과거에는 연구자가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계산을 반복하며 답을 찾았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새로운 가설을 제안하고 슈퍼컴퓨터가 이를 빠르게 검증한다. 과학기술 경쟁력은 더 이상 연구자의 아이디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계산하고 학습·검증할 국가적 연구 인프라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세계 주요국은 이미 이를 국가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제네시스 미션’과 ‘액세스’ 프로그램 등을 통해 슈퍼컴퓨터와 연구데이터, 실험시설, AI 모델을 연결하는 통합 연구환경 구축에 나섰다. 유럽은 ‘EuroHPC’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의 자원을 공동 운영하며, 일본은 ‘HPCI’를 통해 후가쿠 등 슈퍼컴퓨팅 자원을 단일 창구에서 신청·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장비 확충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분산된 자원을 연결하고, 연구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분야별 전문 지원을 결합한 공동활용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AI for Science’와 ‘K-문샷’ 등을 통해 국가 과학기술 AI 역량 결집에 나섰다.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과 GPU 공동 활용 논의 역시 같은 맥락이다. AI 연구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대규모 GPU 자원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은 전력과 냉각, 공간, 운영인력 등 현실적 제약이 크다. 결국 필요한 것은 개별적 자원 증설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컴퓨팅 자원을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함께 활용할 수 있는 공유 체계다.
현재 국내 연구 현장에는 분명한 병목이 존재한다. AI 모델 학습과 GPU 기반 시뮬레이션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자원은 기관별로 분산돼 있다. 연구자는 자원 활용을 위해 서로 다른 계정과 신청 절차, 소프트웨어 환경 등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수요가 특정 자원에 집중되는 동안 다른 자원은 유휴 상태로 방치되는 비효율도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국가R&D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구조적 문제다.
이 때문에 GPU 등 슈퍼컴퓨팅 자원의 ‘공동 활용 플랫폼’ 구축은 필수다. 연구자가 전국의 고성능 컴퓨팅을 하나의 도서관처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단일 창구에서 유휴 자원을 실시간으로 확인·신청하고 복잡한 준비 과정 없이 바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대용량 데이터를 안전한 이동 체계와 효율적인 배분 정책도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에 바이오·소재·우주 등 분야별 연구 특성을 고려한 전문 지원까지 더해져야 한다. 그래야 연구자는 장비 사용법이 아니라 본래의 과학적 질문에만 집중할 수 있다.
AI 시대의 슈퍼컴퓨팅은 일부 전문가만 사용하는 거대 장비가 아니라 과학기술 혁신의 공공 인프라다. 흩어진 GPU와 슈퍼컴퓨팅 자원을 연결하고 접근성을 높이는 플랫폼이 구축될 때 우리 과학기술은 도약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큰 자원이 아니라, 이를 국가적 연구역량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공동 활용 체계다. 이 기반을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가 대한민국 AI 과학혁신의 속도를 결정할 것이다.
정기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 기술개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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