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소식이 산을 넘지 못한 땅 [지도 위를 걷다 봉화 각화산]

신용석 기획위원 2026. 6. 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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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각화산·왕두산·형제봉·아홉사리봉
각화산~왕두산~형제봉으로 이어지는 각화지맥
왕두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왼쪽 각화산과 오른쪽 태백산.

한국에서 가장 오지는 어디일까. AI(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속옷 브랜드 BYC가 답으로 나왔다. 경북의 B봉화, Y영양, C청송이다.

'이 지역들은 태백산맥 산간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어렵고, 인구 소멸 위험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봉화는 숲이 우거져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인 첩첩산중 마을이 많다. 육지 속의 섬이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위치한 봉화는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 지맥들이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지붕을 이루고, 험준한 산악에서 발원한 거친 물살이 계곡을 깎아내 낙동강의 최상류를 비롯되게 하면서 아름다운 산수풍경을 빚어낸 곳이다. 산세가 험하여 외세 침입이 어렵고, 거기에 전쟁, 질병, 가난이 없어 무릉도원 같은 곳으로 여겼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으로 지목되었던 곳이 바로 봉화다.

그런 봉화에서도 있는지 없는지 절대 티를 내지 않는 절이 각화사, 오지 중에서도 오지의 산이 각화산, 외부의 적은 절대 찾아낼 수 없도록 왕실의 기록물을 꼭꼭 숨겨놓은 곳이 태백산(각화산) 사고史庫다. 1,000m급 봉우리들이 즐비하지만 이정표도 리본도 없고, 길 흔적도 희미하다. 블로그의 산행기마다 같은 장소에 대한 팩트와 루트가 다르다. 그곳으로 간다.

각화사. 오지 중의 오지에 들어앉았건만, 더 깊은 곳은 없을까? 더 고요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묵언의 절'. 절 뒤에 각화산.

석현2리~각화사~각화산~왕두봉~석현2리 10km

꽃세상華을 깨우치며覺 걷는 수행의 길

산을 직장 삼아 다닌 지 40년이 넘은 나에게 각화산은 처음 듣는 산이다. 산을 좀 탔다는 지인들에게 물어도 무명의 산이고, 봉화에서 오래 살았다는 지인도 산 아래 각화사는 소풍 때 갔지만, '산'에 갈 생각은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주변의 청옥산(1,277m), 문수산(1,206m)은 자주 갔는데, 같은 1,200m급인 각화산은 홀대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료를 뒤적여 보니, 그곳은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을 보관해서 꼭꼭 숨긴 사고史庫가 있을 만큼 산세가 험하고 길도 희미해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다. 아니 얼마나 험하면? 이라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각화산을 간다.

각화산은 경북 봉화군에서 가장 북쪽인 춘양면의 북쪽에서, 더 북쪽의 태백산 줄기와 이어져 있다. 산이 높고 숲이 우거져 볕이 들기 어려운 곳, 기나긴 겨울에는 산도 사람도 꽁꽁 얼어붙는 곳, 그래서 따뜻한 봄볕이 너무도 고마운 곳, 그래서 동네 이름이 춘양春陽이다.

춘양터미널에서 새벽 6시 40분 첫 버스를 타고, 총알택시처럼 달려 10분 뒤에 석현2리 '공세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쌀랑하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난다. 다른 곳에서는 다 떨어진 산수유 노란꽃이 여기서는 한창이다. 나를 본 개 한 마리가 짖자, 온 동네 개가 다 짖어대 동네 사람들한테 미안하다. 그러나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는 온통 사과나무밭이고, 거기서 나는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조금 지나자 향긋해진다.

각화산 정상. 잡목에 가려 있던 중 북쪽을 열어 태백산과 백두대간 방향이 조망되고 있다. 정상석에는 '천하명당 조선십승지'라 쓰여 있다. 가장 살기 좋은 10개의 명당 중 한 곳이란 뜻이다.

각화사까지 2.5km 오르막 도로를 30분쯤 걸어 마지막 민가를 지나니, 도로를 막는 커다란 철문이 나오고 휘청휘청 뻗은 고목들 사이로 절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휘이휘이 길을 돌아 절 앞에 이르고, 돌계단 32단을 올라 '태백산 각화사'라고 쓴 편액이 걸린 전각을 지나면, 대웅전 마당으로 올라가는 32단의 계단이 나온다. 전각의 기둥마다 '묵언'이라고 쓴 다짐이 절 분위기를 착 가라앉히고 있다. 그래서 방 앞마다 신발은 가지런하지만, 절집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다. 절만 있는 절 같다. 사각사각~ 마당의 모래를 밟는 소리마저 죄송하다.

나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쫓겨나듯 절을 나선다. 앱에서 몇 번 확인했던 '이미지 지도'를 따라서 해우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해우소解憂所! 근심을 푸는 곳이라니! 화장실의 별칭으로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표현이다. 해우소 옆으로 난 오솔길을 한참 따라가면서, '아니 왜 길이 이렇게 좋지?' 했는데, 램블러 앱을 확인해 보니 해우소를 지나자마자 산 쪽으로 난 계류를 따라가야 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원칙이지만, 막바로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 호기를 부린다. 1분도 되지 않아 후회했다. 발목이 꺾일 정도의 경사가 계속되어 덩굴을 부둥켜 잡고 네 발로 오르느라 온몸이 금방 땀에 젖는다. 헐떡거리며 20분쯤 '알바' 끝에 능선에 올라 드디어 길 흔적과 만났다.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오른다. 계속 거친 오르막이다.

각화산이어서 살아남은 춘양목. 최고의 금강소나무로 치는 춘양목은 거의 잘려 나갔지만, 산세가 험한 이곳의 춘양목은 살아남아 늠름한 기상을 펼치고 있다.

길옆으로, 가운데로 무덤이 많이 나온다. 무너진 무덤에 어린 소나무들이 잔잔하게 자리를 잡은 곳도 있다. 그늘진 숲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다. 조금 더 가다가 어린 소나무들의 부모들을 만난다. 두 아름이 넘는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으며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었다. 가지가 뒤틀리고 굽어진 모습이 춤을 추는 듯, 세월의 풍파를 보여 주는 듯하다.

소나무들을 안아 본다. 노모의 손등처럼 꺼칠꺼칠하다. 대한민국에서 줄기가 가장 곧고, 껍질이 붉고, 팔 벌린 기상이 늠름한 소나무를 금강소나무로 부르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소나무가 이곳에 있어 특별히 '춘양목'으로 부른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이곳의 소나무를 사용해서 유명해졌고, 일제강점기와 국토개발 시기에 마구 베어져 수난을 당했다. 미인박명이다. 지금 내가 마주한 춘양목은 숱한 난리에도 살아남은 '조선의 소나무'들이다. 각화산의 험한 산세가 이들을 살린 것이다.

어디선가 고라니의 거친 포효가 산을 울린다. 얌전하게 생긴 짐승이 저토록 비명을 크게 질렀으니 그에게 큰 위기가 닥친 것이 틀림없다. 삵을 만났을까? 담비를 만났을까? 내게는 멧돼지가 문제다. 사람 흔적 없는 낙엽길에 멧돼지 코가 훑고 간 흔적들, 무거운 멧돼지가 깊게 파고 간 발자국이 많다.

오를수록 경사가 급해진다. 그야말로 수행의 길이다. 저만치 능선과 하늘이 보이는데, 바닥은 낙엽에 덮여 길이 사라졌다. 바다를 헤엄치듯 이리저리 휘적이며 간신히 올라서니 갈참나무 거목들이 무성한 주능선이다. 5분쯤 올라서니 작은 언덕 끝에 각화산 정상석이 있다. '반듯하게 가공한' 정상석이 야생의 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상석에 1,176.7m라고 쓰여 있다. 공식적인 높이 1,202m와는 25m 차이가 있다.

태백산 사고史庫 터. 적이 침입해서 가져갈 수 없도록 '조선왕조실록'을 오지 중의 오지에 꼭꼭 숨겨 놓은 곳. 오른쪽 건물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공부했던 모든 자료에 각화산 정상은 잡목이 우거져 전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북쪽의 잡목들을 모두 베어내, 지금 내 앞에는 왼쪽 가까이 백두대간의 구룡산, 가운데 멀리 두툼한 태백산 정상이 선연하게 펼쳐진다. 미세먼지가 자욱해 어렴풋하지만, 백두산에서 발원해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국토의 대동맥이 불끈불끈 솟아 내게 기氣를 전한다. 온몸에 힘이 들어온다. 다만, 사람의 욕망 때문에 베어져 나뒹굴고 있는 나무들은 측은하다. 다른 산 같으면 "훼손이다! 아니다!" 난리가 났을 것인데, 오지의 산은 조용하다.

정상에서 되돌아 나와 능선 동남쪽으로 나아가니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 나뭇가지 사이로 앞으로 가야 할 왕두산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문수봉, 그 너머로 소백산이 이어지는 산맥을 바라본다. 가까이 북쪽 사면에는 아직 잔설들이 하얗게 반짝이고,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춘풍이 아니다. 열 받았던 몸이 싸늘해진다.

능선길은 돌부리들이 날카로운 급경사 내리막이다. 갑자기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없는 오지의 산에서 발을 접질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오른쪽으로 사고史庫터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여긴가 저긴가 하며 진행하다가, 앱을 확인해 보니 이미 한참을 지나쳤다. 앱이 가리킨 포인트까지 되돌아갔으나 절벽 같은 비탈이 모두 낙엽에 덮여 있다. 하긴 그러니까, 좀처럼 찾기 어려운 이곳에 왕실의 보물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각화사 스님들은 아예 사고 터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길을 정비하거니 이정표를 세우는 것도 반대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고 터를 찾아갔다가 구조요청을 한 사례가 엄청 많았다고 한다. 나홀로 산행자들은 그냥 지나치는 게 현명하다.

계속 능선길을 간다. 길은 자꾸 사라지지만 산등어리로만 가면 방향을 잃지 않는다. 무릎까지 묻히는 낙엽밭이 있는가 하면, 낙엽층의 쿠션을 꾹꾹 눌러댄 '멧돼지 침대'도 많다.

진짜 춘양목. '억지춘양'이란 말이 있다. 춘양목이 아닌 나무를 억지로 춘양목이라고 속여서 판다는 것이다. 왕두산에서 각화사로 내려가며 '진짜 춘양목'을 만난다.

왕두산 정상에 도착하니, 멋진 춘양목 한 그루가 왕의 머리를 우산처럼 받쳐주고 있다. 삼각점만 있고, 정상석은 정상에서 30m를 더 가서 '더 낮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도 1,044.3m로 쓰여 있어, 공식적인 높이 1,046m와 차이가 있다.

조망은 좋은 곳이지만, 오늘은 가스가 자욱하다. 각화지맥 남쪽 능선인 형제봉과 화장산이 멀리서 어른거리고, 북쪽으로는 지나온 각화산과 더 멀리 태백산이 어렴풋하다. "비 온 뒷날 다시 오자!" 이렇게 '빈 약속'을 하며 하산을 시작한다. 어디가 하산로지? 5분쯤 헤매다가 춘양목이 서 있는 '진짜 정상'으로 돌아가 남쪽 능선을 내려선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길을 15분쯤 내려서니 오른쪽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을 환하게 쪼이고 있는 동암(금봉암)이 보인다. 급한 비탈길을 내려서면서 쭉쭉 뻗어 곧게 올라가는 청년 소나무들을 만난다. 그들의 탄탄한 기둥을 만져보며 "어서 금강소나무의 위용을 갖추기 바란다!"는 덕담을 내준다. 지나온 각화산을 바라본다. 내려설수록 더 크게, 더 높게 올려다 보인다. '언젠가는 만나고, 또 헤어진다'는 시절 인연처럼 만난 산이라, 자꾸자꾸 바라보며 헤어진다. 내리쏟을 듯이 급한 비탈길을 내려서니 짧은 임도가 나오고, 곧 각화사 입구에 닿는다.

조용한 절, 조용한 산이었지만,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은 "찰찰찰~" 힘이 넘친다. 몸은 자동으로 계곡에 다가가 엎드려뻗쳐 자세로 한 모금의 물을 넘긴다. 온몸이 시리면서 정신이 또렷해진다. 각화覺華(깨우침)의 근처에 온 것일까? 앉은 자세로 돌아와 가까이 보니, 한 뼘의 수면에 춘양春陽(봄볕)이 비치고, 그 속에서 버들치 몇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탐하며 열심히 노닌다. 그들의 행로가 만든 궤적으로 수면에 비친 나뭇가지가 슬며시 흔들린다. 어디서 이런 세상을 볼 것인가!

산행길잡이

각화사에서 각화산을 오르려면 절 왼쪽의 해우소를 벗어나자마자 오른쪽의 작은 계류로 올라서거나, 절의 맨 끝에 있는 산영각 위로 올라서야 하는데, 두 곳 모두 길목 흔적은 희미하다. 일단 오솔길에 접어들면 정상까지 길 잃을 염려는 없지만, 군데군데 낙엽에 덮여 길 흔적이 끊어지기도 한다. 각화산에서 왕두산 방향으로 가다가 태백산 사고史庫 터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길 흔적을 찾기 어렵고 경사가 급해서 초행자나 단독 산행자는 가지 않는 게 좋다. 왕두산에서 하산은 정상석 부근이 아니라, 정상석에서 북쪽으로 30m쯤에 있는 삼각점이 있는 '진짜 정상'에서 각화사 방향의 지능선으로 내려서야 한다.

교통

춘양면에서 각화사까지는 8km로 택시로 15분, 택시비는 약 1만3,000원이다. 버스는 춘양터미널에서 서벽행 버스를 타고 15분쯤 뒤에 공세동 버스정류장(석현2리)에서 내려, 2.5km를 걸어 각화사에 도착한다. 봉화에서 모든 시내버스는 무료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춘양까지 하루 3회(첫차 7시 10분) 버스가 다닌다. 봉화를 경유해서 3시간 넘게 소요된다. 대구에서 춘양까지는 하루 4번 버스가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서울 방향에서는 중앙고속도로의 풍기IC를, 대구 방향에서는 영주IC를 빠져나와 36번국도를 타고 봉화를 거쳐 춘양까지 온 후, 88번 지방도를 타고 각화사 입구까지 오면 된다.

숙소(지역번호 054)

동아모텔(672-3109), 이프모텔(673-2800), 춘양목 호스텔(672-6669), 태백여관(672-3164), 백두대간수목원 가든스테이(679-0840), 각화산 캠핑장(010-2398-8791)

억지춘양시장 내 동궁식당의 돌솥밥. 송이, 능이, 엄나무순의 향이 그윽하고, 수두룩하게 나오는 깔끔한 반찬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하다.

맛집(지역번호 054)

춘양터미널 주변과 '억지춘양시장'에 블로그에 나오는 먹거리 음식점이 많다. 모두 5분 거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동궁(송이돌솥밥, 672-2702), 유성기사식당(백반, 673-0488), B앤C(디저트카페 010-7703-6841), 소원떡방(찹쌀떡 672-4444), 춘양빵집(통밀빵 010-3333-8270)

* 등산 지도 _ 특별부록 지도 참조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각화지맥. 밋밋한 정상에서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각화지맥의 구렁이 같은 능선을 조망한다.

석현1리~형제봉~외씨버선길~춘양역 17km

이정표도, 리본도, 사람도 없는 각화지맥

어제는 각화지맥 1코스인 각화산-왕두산 능선을 걸었고, 오늘은 각화지맥 2코스를 타다가 외씨버선길을 따라 춘양으로 들어오는 길을 걷는다. 각화지맥은 태백산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 척추에서 동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갈비뼈에 해당한다. 각화산(1,202m), 왕두산(1,046m), 형제봉(835m), 아홉사리봉(759m), 화장산(859m)을 거쳐 봉화군 낙동강 상류에서 맥을 다하는 36km의 산줄기다.

오늘 새벽의 춘양은 영하 1℃, 서울은 영상 10℃다. 춘양터미널에서 6시 40분 '총알 버스'를 타고 5분 만에 석현1리 입구에 내리니 집도 사람도 없어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아침부터 고독하다. 골짜기 중간으로 난 도로를 따라 산 방향으로 걷는다. "졸졸졸" 계곡물 소리와 "짹짹짹" 새소리를 들으며 꾸역꾸역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이 나오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들어갈수록 계곡은 좁아지고 길가의 집들이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진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개들만 "컹컹컹" 짖어댄다.

30분쯤 걸었을까, 마침내 아스팔트 길이 끝나고, 좁다란 시멘트 길이 구부러지는 지점에서 산길을 찾아 오른쪽 밭으로 들어선다. 밭과 산 경계에는 짐승 출입을 막으려고 설치한 전깃줄이 쳐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어렴풋한 길 흔적을 찾아내 그곳의 전깃줄을 넘으니 도둑이 담을 넘는 심정이다. 길 흔적을 무심코 따라가다 작은 계곡에서 길이 막힌다. 앱을 확인해 보니 밭을 벗어나자마자 왼쪽의 능선을 치고 올라가야 했다. 길은 쉴 틈을 주지 않고 계속 급경사 오르막이다. 5분 간격으로 나오는 묘지마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정말 CCTV가 있을까? 형제봉까지 산길에는 송이밭에 '입산금지' 리본과 표지가 수두룩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조망되는 각화지맥.

첫 번째 능선을 올라서니 잔 나무와 잔가지들이 뒤엉켜 길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자 송이채취구역이라 쓰인 리본과 하얀 금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런 곳에는 지역주민들이 외지인들의 출입을 대단히 민감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등산로 리본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붕~붕" 산은 적막한데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쯔삣 즈삣~" 이름 모를 새가 리듬을 타며 노래한다. 간간이 앱을 확인하며 두 번째 능선에 오르니 멀리서 발원한 각화지맥의 등어리가 구렁이처럼 휘어져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동남쪽으로 보이는 두 개의 봉우리가 형제봉일까, 한걸음에 건너갈 것처럼 보이지만, 거의 1km 거리다. 전망은 곧 사라진다.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 길을 걷는다고 해야 하나, 헤맨다고 해야 하나, 앱에 그어진 선 하나만 믿고 숲속을 올라서고, 또 올라선다.

양심껏 1개씩만 가져가세요. 외씨버선길의 모래재 입구에 있는 '양심 장독대'. 목마른 나그네에게 생수 한 병을 공짜로 주는 '착한 봉화'.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되었다. 헐떡이며 앱에 표시된 형제봉에 왔건만, 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비스듬한 숲 바닥에 잔가지들만 뒤엉켜 있다. 앱이 잘못되었나? 의심하면서 언덕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준.희' 표지기로 유명한 최남준 선생이 쓴 듯한 '834.9m' 하얀 판넬과 리본 여러 개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곳을 발견했다.

여기가 형제봉이다. 봉우리라기보다는 산길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쯤으로 보인다. 조망도 없어, 나뭇가지들 틈으로 먼 산이 간신히 어른거린다. 이곳을 목표로 찾아온 사람에겐 완전 실망이다. 다만 북서쪽에서 우뚝 선 두 그루의 우람한 금강소나무가 '위로의 풍경'을 보여 준다.

형제봉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잠시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각화지맥의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하산해서 평지를 돌아 다시 각화지맥 남쪽으로 올라설 것인가? 왜냐하면 램블러 앱의 지도에는 능선길이 없고 하산길만 그어져 있다. 소심하게도 램블러 앱을 따라가기로 했다.

외씨버선길 임도. 형제봉과 각화지맥에서 전투를 치른 후,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자작나무길을 걷는다. '오이씨처럼 날렵하게 생긴 버선'처럼,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하산로도 앱에 선만 그어져 있을 뿐 현지에서는 길이 없는 것과 같다. 급경사 내리막을 뒤덮은 낙엽은 길 흔적을 지워버렸고, 반짝이는 잎들은 반들반들 미끄러워서 연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나마 낙엽이 쿠션이 되어 엉덩이를 보호해 주니 병 주고 약 주는 식이다. 그렇게 1시간을 내려서서 커다란 과수원을 지나 부드러운 흙길을 내려가니 산촌의 외딴집들이 드문드문 나온다. 마을이 반갑지만 집집마다 개들이 마구 짖어댄다.

여기서 램블러 앱은 길 표시가 끝났고, '네이버 길찾기'로 각화지맥의 '살피재'를 검색해서 내리막 0.5km, 오르막 1.5km의 도로를 걸었다. 가벼운 오르막이지만 급한 산길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살피재' 직전 100m 지점에서 도로는 끝나, 오솔길이라도 있는지 살폈으나 덩굴만 우거져 있을 뿐 나아가는 길이 없다.

가운데 도랑을 따라 잔가지를 헤치고 올라가다, 나뭇가지들이 너무 우거져 돌파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배낭을 바싹 동여매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낮은 포복으로 20m를 기어 올라갔다. 앞은 흙 범벅, 등은 땀범벅이 된다.

드디어 살피재에 도착해 커다란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준 풀밭에 벌렁 누웠다. 땅이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듯 편안했고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러나 서울 가는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물 한 모금 들이켜고 다시 출발이다. 임도를 올라서서 언덕의 숲속으로 들어갔으나 여기서 또 길을 놓쳤다. 스마트폰을 열었으나 먹통 구간이다. 엊그제 캡처한 산행기와 사진을 꺼내 집중해 읽으면서 주변 지형을 살펴 간신히 방향을 잡았고, 곧 '준.희' 표지기의 '각화지맥 759.3m'라고 쓴 판넬을 찾아냈다. 어떤 블로그에는 이곳을, 다른 블로그에는 인근의 742.6m 지점을 아홉사리봉으로 적고 있다. 이 판넬에서 남쪽으로 소나무숲을 내려가며 "이 길이 아니면 어쩌지?" 조마조마했는데, 고맙게도 드디어 외씨버선길 이정표가 설치된 임도와 만난다.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에서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까지 이어지는 보부상길이다. 보부상褓負商은 조선 후기 봇짐을 지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조직적인' 상인이다. 240km에 달하는 이 길을 이으면 '오이의 씨처럼 볼이 좁고 맵시 있는 버선' 모양이어서 외씨버선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은 한국의 대표적 오지를 지나며 아름다운 자연과 향토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생태·문화탐방로다.

각화지맥과 외씨버선길이 만나는 포인트는 '높은터'라는 곳이다. 각화지맥 입장에서는 '낮은 터'인데, 외씨버선길 입장에서는 '높은 터'다. 임도를 따라 보드라운 흙을 밟으니 몸이 편하고, 이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니 마음도 편하다. 중산간에 불어오는 바람이 양지에선 따뜻하고 그늘에선 서늘하다. 임도의 끝에 가마골이라는 동네가 나오고, 30분쯤 도로를 걷다가 관석교 다리에서 좌회전하면 모래재를 넘는 작은 고개가 나온다.

고개 입구에 '양심 장독대'라는 표지판이 있고 그 아래의 장독 뚜껑을 여니 생수 여러 병이 쟁여져 있다. 목마르면 하나씩 가져가라는 것이다. 그늘 아래 장독이 냉장고 구실을 해서 생수가 시원했다. 공짜라는 생각보다는 나그네를 생각해 주는 인심이 고마웠다. 하얀 마사토 알갱이들이 바람에 폴폴 날리는 모래재를 넘어 20분쯤 걸으면 곧 춘양면 외곽 마을이다. 춘양역 지나 작은 공원에 있는 화장실에서 땀을 닦고, 버스터미널 옆 춘양빵집에 갔으나, 오후 4시인 지금 이미 다 팔려 문을 닫았다.

주말인 어제도, 오늘도 산에서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으니 오지는 오지다.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에게도 이곳이 오지일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길가에서 슬쩍 본 농가마다 승용차와 작업용 차량이 있고, 커다란 트랙터가 있는 집도 많다. 최고의 오지인 춘양에 철도가 '억지로' 놓여 '억지 춘양'이라는 애칭이 생기기도 했다. 봉화에서는 시내버스가 공짜고, 외씨버선길에서는 생수도 공짜다.

아름다운 산수가 고스란히 남아 향토적인 풍경이 되었고, 인근의 백두대간 자락에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호랑이 숲'이 있다. 전쟁과 가난과 질병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지의 한 곳인 이곳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지가 아니라 길지吉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춘양을 떠난다. 풍경에 춘양(봄볕)이 가득하다.

호랑이 숲에 마련된 물가에서 더위를 식히는 호랑이. 사진 백두대간수목원

백두대간수목원

춘양면에서 13km 거리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약 1,500만 평 규모로 아시아에서 첫 번째 규모의 수목원이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백두산호랑이다. 축구장 6개 크기에 해당하는 호랑이숲에서 6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으며, 관람객들은 한쪽에 마련된 울타리에서 호랑이들을 구경할 수 있다. 넓은 숲에서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호랑이들에게는 야생성이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시드볼트Seed Vault다. 시드볼트는 식물의 씨앗을 영구적으로 보관하는 지하 46m의 시설이다. 만일 지구에 재앙이 초래해 어떤 식물이 멸종되었을 때 그 식물의 씨앗을 꺼내 다시 싹 틔우게 할 수 있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다. 현재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국내·외 식물종자는 6,000종이 넘는다.

산행길잡이

석현1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계곡 끝의 마지막 민가가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길 입구는 민가의 밭이므로 발자국을 조심해야 한다. 형제봉까지 급경사 오르막을 꾸역꾸역 오른다. 밋밋하고 전망도 없는 형제봉에서 남쪽으로 하산한다. 하산로는 낙엽에 덮여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마을 어귀로 내려와 산중의 시멘트 도로를 오르다가, 살피재 입구에서 빽빽한 덩굴숲을 만난다. 숲바닥에 바짝 엎드려 포복해야 통과할 수 있다. 이후 아홉사리봉에서 방향을 잃을 수 있는데, 남쪽의 소나무 숲으로 길 흔적을 잘 따라가서 외씨버선길 임도를 만나면 '길 고생'은 끝난다. 춘양면까지 7km의 길은 멀지만,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서벽 금강소나무 군락지 산책로. 사진 봉화군청 홈페이지

인근 볼거리

서벽 금강소나무 군락지

금강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곧고 늠름해서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소나무들이 춘양면 서벽리의 문수산 자락에 1,500그루 넘게 자생하고 있다. 곧게 뻗은 자태가 아름다워 미인송으로도 불린다. 외씨버선길과 함께 가는 약 3km의 숲길을 걸으면 솔향기와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공기를 실감하게 된다. 미리 예약하면 생태해설사들이 동행하면서 춘양목의 생태적·문화적 가치를 설명해 준다. 백두대간수목원의 후문과 인접해 있다.

열목어가 노니는 백천계곡

태백산 문수봉과 청옥산에서 발원한 백천계곡은 낙동강의 최상류다. 계곡물이 얼마나 차갑고 깨끗한지 냉대성 물고기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열목어에 백천계곡은 세계 최남단의 서식지다. 백천마을에서는 국립공원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생태 힐링 체험 프로그램'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백천계곡에서 태백산 문수봉(1,515m)까지 약 5km의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어 5~6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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