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헤밍웨이와 피카소가 매혹된 격렬한 죽음의 발레, ‘고독의 오후’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10번째 레터는 3일 개봉한 투우사 다큐멘터리 ‘고독의 오후’입니다. 투우를 실제로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영화가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주 가까이, 아주 아름답게, 아주 잔인하게. 화면으로만 보는데도 칼과 작살을 휘두를 때마다 피냄새가 진동합니다. 청불 등급입니다. 투우사와 소,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결투. 현존 최고의 스타 투우사인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실제 투우를 보시면서 여러분은 자신도 몰랐던 성향을 발견하시게 될 거예요. 아, 나 이런 사람이었네. 아름다움이냐 잔인함이냐, 자아 발견의 기회를 드릴 영화 ‘고독의 오후’가 보여주는 투우의 세계로 잠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번 레터 제목에 헤밍웨이와 피카소를 넣었는데, 투우하면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 헤밍웨이가 쓴 ‘오후의 죽음’(1932)이 투우 이야기죠. 투우는 오후의 경기입니다. 스페인의 작열하는 태양이 기력을 소진한 오후 5시나 6시에 열리니까요. 영화 ‘고독의 오후’가 말하는 오후도 그 무렵입니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경기장에서 투우사 혹은 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둘 중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둘 다 고독한 건 맞죠. 아마 이 영화 제목은 돌진해오는 소에 맞서는 투우사의 고독을 얘기하려는 것이겠지만, 저는 영화를 보다가 소 역시 죽음에 맞서 홀로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투우사가 아니라 소에 눈이 가기 시작하면 이 영화를 보기 매우 힘들어지실 수 있습니다. 동물권 운동가들이 투우 금지에 목소리를 높일 만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소 입장에서는 학살이니까요. ‘고독의 오후’는 다큐멘터리고, 죽어가는 소, 죽어서 끌려나가는 소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 등급이 청불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잔인하고, 저도 보다가 몇 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도 ‘고독의 오후’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에도 역시 이유가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실까요. 헤밍웨이는 저서 ‘오후의 죽음’(책미래, 2013, 번역 장왕록) 도입부에서 말합니다.
“현대의 도덕적 견지에서 보면, 투우 전체가 변명할 여지가 없다. 확실히 잔인한 구석이 많고, 스스로 구하는 것이건 예측하지 않은 것이건 간에 언제나 위험이 있으며 항상 죽음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투우를 변호할 생각은 없고 다만 내가 투우에서 정말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정직하게 이야기하려고 할 뿐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불쾌감을 가지고, 이것을 쓴 사람은 그들과 곧 독자들과 같은 부드러운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면 나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 정말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으려면, 그는 남자거나 여자거나 할 것 없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실지로 보고 그것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떤 것인가를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이다.”
저는 이 관점이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 감독의 시각과 의도했든 안 했든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글’을 ‘영화’로만 바꾸면 됩니다. ‘내가 보여주는 것들을 실제로 보고 그것들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것인가를 아시라’고 하는 거죠. 다큐 주인공인 안드레스 로카 레이는 나이 서른의 젊은 스타 투우사입니다. 예정된 죽음을 향해 비극의 템포를 끌어올리는 주연으로 손색없는 키 큰 미남입니다. 그런 남자가 관중이 운집한 투우장에서 소를 죽이든, 소에 받혀 죽든 비극성은 극대화됩니다. 그가 차를 타고 투우장으로 가고, 투우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고 다시 투우장으로 가는 동선을 따라가며 영화가 전개됩니다.

‘고독의 오후’는 기이하게 탁월합니다. 이전에 여러분이 보셨을 많은 다큐는 관계자 인터뷰로 앞뒤를 설명하고, 자료 화면을 넣어 이해를 높입니다. 쉽고 평이한 접근이죠. ‘고독의 오후’에는 그런 것이 일절 없습니다. 피사체가 주는 극적인 흥분과 긴장, 사이사이 숨죽인 침묵과 고요의 대비만으로도 이미 완성된 작품이니까요.
로카 레이가 탄 차량에 설치한 카메라가 포착한 그의 모습과 동료들의 대화는 시나리오 작가가 썼어도 이보다 더 영화적으로 쓰기 어려웠을 허무와 모순도 드러냅니다. 투우는 로카 레이처럼 붉은 천(무에타)을 흔드는 투우사(마타도르)를 중심으로, 중간에 말타고 나와 소에게 창으로 상처내는 피카도르, 작살 꽂아넣는 반데리예로 등이 팀으로 움직이는데, 그들이 함께 차를 타고 로카 레이를 응원하면서 열에 들떠 떠듭니다. “관중 함성 들었어? 다들 난리야. 목숨이 별거야? 진짜 대단했어! 넌 다른 투우사들보다 한 수 위야. 네 인생 그 자체인 경기였어. 넌 최고야!”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계속 나옵니다. “투우사의 본모습은 싸울 때 드러나. 그런 게 투우사야. 이 정도로 순수한 투우는 없어. 인간의 경지가 아냐. 넌 초인이야!”
최고의 찬사가 터지는데 로카 레이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말이 거의 없는 편인데, 딱 한 번, 들뜬 동료들의 아우성 한가운데서 그가 던진 차분한 한마디가 제 귀에 오래 남았습니다. “소는 원래 다 겁쟁이야.” 자신을 향해 시속 수십킬로로 돌진해오는 소를 정면으로 마주해 본 그의 결론. 제겐 어쩐지 “나 사실 겁이 났어”로 들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예상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로카 레이가 투우복을 입는 모습이었는데요, 투우복의 섬세한 세공과 장식도 감탄스러웠지만, 혼자 착장을 못 하고 도움을 받아 완성되는 과정은 숙연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했습니다. 옷을 입을 뿐인데 왜 보는 이가 비감해지는지. 세상 마지막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일까요.
‘고독의 오후’는 2024년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조개상을 받았고, 프랑스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2025년 최고의 영화’ 1위에 올랐습니다. 저는 카이에 뒤 시네마가 뽑았다고 하면 ‘또 다량의 수면제가 포함돼 있겠군’ 하는데 ‘고독의 오후’는 아닙니다. 자던 소도 일으켜세울 고농도의 각성제가 들어있습니다.
투우장 관중이 죽음을 대리체험하며 살아있음의 쾌감을 충전하듯, 하루치의 죽음을 가까스로 넘겨낸 투우사를 보며 이 영화 관객은 폭력과 마력, 생존과 일상의 경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숨어있는 겁쟁이를 들키지 않으면서 평소 몰랐던 인간의 일면을 만나보시면 어떨지. 아래에 프랜시스 베이컨과 피카소의 투우 그림 한 점씩 보여드립니다. 피카소에게 투우는 조국 스페인의 유산이니 숨쉬듯 느껴졌을 것이고, 원래 인간을 고깃덩이로 생각하는 베이컨에게도 투우는 끌리는 소재였을 것 같습니다. 둘 중 하나 고르라면 저는 베이컨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그럼,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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