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의 급소’ 아르메니아 친서방 움직임에… 분노한 푸틴

정지섭 기자 2026. 6. 4.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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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협력은 심각한 안보 위협”
카자흐 등과 脫러시아 차단 나서
아르메니아가 서방 진영 합류 땐
러, 중동 진출 통로 상실할 가능성
지난 5월 5일 아르메니아 EU 정상회의차 만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웃으면서 입장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총리실

지난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옛 소련권 국가들의 경제협력체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정상회의에서는 이례적인 공동성명이 나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카자흐스탄·벨라루스·키르기스스탄 등 4국 정상 공동 명의로 나온 성명은 회원국 아르메니아를 사실상 겁박하는 내용이었다. 성명은 아르메니아가 지난달 초 유럽연합(EU)과 정상회의를 열고 협력을 강화한 상황을 ‘EEU 회원국 경제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아르메니아에 EEU에 잔류할지, EU에 가입할지 결정할 국민투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지난 2일 러시아 식품검역당국은 아르메니아산 과일에 대해 위생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수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오는 7일 열리는 아르메니아 총선에서 자국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여론전도 벌이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유대 관계가 깊은 나라다. 로마·페르시아·오스만튀르크 등 제국의 압제에 오랜 세월 시달려온 아르메니아는 17세기부터 같은 기독교권인 제정 러시아와 밀착하며 생존을 모색했다. 소련 붕괴로 별개 나라가 된 뒤에도 두 나라는 밀착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최근 EU·미국과 경제·자원·안보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며 탈러시아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의 공세가 다방면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4일 아르메니아 예레반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총리실

◇러, 역내 통제력 잃을까 전전긍긍

아르메니아는 옛 소련 15국 중 면적(한반도의 13.5%)은 제일 작고, 인구(310만명)는 서울시 인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소국(小國)의 움직임에 러시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르메니아가 ‘지정학적 급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가 자리한 남캅카스는 중동·유럽·중앙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다. 아르메니아가 서방 진영에 합류할 경우 러시아가 200여년간 자국 세력의 중동 진출 통로 역할을 해온 남캅카스에 대한 통제력을 급격히 상실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인 튀르키예, 미국과 전쟁 중인 이란과 접경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 영향력이 퇴조할 경우 나토가 동진하고 러시아·이란의 연계는 차단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아르메니아와 함께 러시아 주도 옛 소련권 국가 협력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동요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푸틴이 필사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라시아 전문가 안나 오하냔 미국 스톤힐대 교수는 프랑스 24 인터뷰에서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주변부 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교정책을 다변화하고 있는데, 푸틴은 러시아를 기준으로 한 지정학적 이분법을 적용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9일 아르메니아 예레반에 도착한 J D 밴스 미국 부통령(오른쪽)이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총리실

◇총선 앞두고 러 여론조작 시도도

지난달 5일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열린 아르메니아·EU 정상회의에서 양측은 에너지·통상·안보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논의했다. EU는 3000만유로 규모의 군사 지원까지 약속했다. 앞서 아르메니아 의회는 지난 3월 EU가입 추진안을 의결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까지 아르메니아를 찾았다.

지난달 27일에는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예레반을 찾았다. 이번 방문을 통해 아르메니아는 미국과 광물자원 공급과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튀르키예를 잇는 수송로 구축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푸틴 입장에선 ‘도발’로 여길 법한 이벤트가 숨가쁘게 이어진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아르메니아와 러시아의 관계에 이상 신호가 켜진 것은 2023년부터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 30년 넘게 벌인 영토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가 자국을 지원하지 않은데 크게 실망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소련권이지만 이슬람 국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옛 소련권 국가들의 군사안보동맹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 정상회의와 합동훈련에 불참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이후 외교 다각화를 명분으로 친서방·탈러시아 정책에 속도를 낸 것이다.

아르메니아 정책 변화의 선봉에는 2018년부터 집권 중인 니콜 파시냔 총리가 있다. 언론인 출신인 그는 민주화 시위로 친러시아 정권을 퇴진시키고 집권한 뒤 아제르바이잔과의 종전 이후 더욱 친서방 정책에 속도를 내고 있다. 3연임에 도전하는 파시냔이 오는 7일 열리는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아르메니아의 탈러시아·친서방 행보에 더욱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향후 며칠간 반서방 여론에 불을 지피려는 러시아의 총공세가 더욱 거세게 전개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의회 입법연구처는 “러시아의 아르메니아 선거 개입 및 여론조작 시도가 거세게 진행되고 있다는 징후가 현지에서 포착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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