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버린 AI'를 위한 비대칭 전략 [아침을 열며]
메모리·방위 등 민감영역 중심
핵심 분야는 '추론주권' 지켜야

지금 글로벌 인공지능(AI) 경쟁의 밑바탕에는 파운데이션 모델의 스케일링보다 더 냉정한 현실이 있다. 바로 컴퓨팅 자원이다. 현재 전 세계 가용 컴퓨팅의 3분의 2 이상은 구글, 메타, 아마존 같은 소수의 미국 하이퍼스케일러가 장악하고 있고, 나머지도 화웨이와 알리바바 등 중국 빅테크가 차지한다. 미국·중국이 AI 연산에 필요한 컴퓨팅 절대 다수를 점유한 구조에서 한국이 스케일 경쟁으로 승부하는 건 어렵다. 아무리 빠르게 고성능 GPU를 확보하고 데이터센터를 늘려도, 국가 단위의 자원이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 한 곳의 투자를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버린 AI'를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날카롭게 정의해야 한다. 한국이 모든 AI를 풀스택으로 국산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그럴 필요도 없다. 소버린 AI의 본질은 "어떤 데이터와 어떤 추론이 국경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가"를 정하는 데 있다. 군사, 정보보안, 반도체 IP, 핵심 국가 인프라, 의료·법률 개인정보처럼 민감 영역은 국내 컴퓨팅 인프라 위에서 안전하게 작동하는 추론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목표 설정부터 바뀌어야 한다. '세계 몇 위권 범용 LLM'이라는 구호는 소버린 AI의 지속가능성이나 성공을 뜻하지는 않는다. 범용 벤치마크 점수는 모델의 일반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일 뿐, 국가안보와 산업 주권의 필요를 측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특정 도메인에서 충분히 정확하고, 안전하며,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모델이다. 특히 반도체 공정, 방위산업, 전력망 운영, 의료 데이터 분석처럼 한국이 반드시 통제해야 할 영역에 특화된 추론 모델이 필요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모델을 처음부터 사전 학습해야 한다는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검증된 오픈소스 기반으로 보안 성능을 강화하고, 도메인 특화로 파인튜닝되고, 민감 데이터는 국내 데이터센터에서 처리하는 구조가 훨씬 현실적이다. 소버린 AI의 경쟁력은 필요한 데이터를 국내에서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상시 가용성과 신뢰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컴퓨팅 자원도 훈련 중심이 아니라 추론 인프라 중심으로 재배분하고, 국가 목적에 부합하는 우선순위를 매길 필요가 있다.
한국이 AI 정책에서 비대칭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메모리와 제조업 데이터에서 찾아야 한다. HBM을 포함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역량은 단순한 부품 경쟁력이 아니라 추론 효율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다. 앞으로 AI가 에이전트형 시스템과 산업 현장의 피지컬 AI로 확장될수록 병목은 단순 연산량이 아니라 실시간 데이터 처리, 메모리 대역폭, 전력 효율, 지연시간 단축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메모리 산업은 소버린 AI와 만날 수 있다.
특히 통신 두절 환경에서도 작동해야 하는 독립형 AI에서는 에너지 효율적인 '에지 추론'이 중요하다. 이런 시스템은 작은 장치 안에서 제한된 전력으로 작동하면서도 충분한 데이터와 맥락을 처리해야 한다. 단순히 저전력 칩만 확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메모리 용량 △대역폭 △전력 효율의 균형을 맞춘 특수 목적 AI 하드웨어가 필요하다. 이것이 상업적 메모리와 소버린 AI가 실제로 만나는 접점이다.
제조업 데이터도 중요한 자산이다. 조선,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화학, 디스플레이 공정에서 축적되는 현장 데이터는 해외 '하이퍼 스케일러'가 쉽게 얻을 수 없는 한국의 고유 자산이다. 반도체 공정 최적화 AI나 방산 시스템 설계 AI가 외국 클라우드에서 돌아가는 순간, 이는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라 경제안보의 문제가 된다.
한국의 소버린 AI는 범용 LLM 강국이라는 막연한 목표보다 '경제안보를 보장하는 제조 AI 플랫폼 강국'이라는 구체적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제조 데이터, 한국 인프라, 산업 특화 모델의 삼각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데이터는 국내 산업 현장에서 나오고, 모델은 해당 도메인에 맞게 조정되며, 추론은 국내 보안 인프라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단순한 GPU 구매 지원을 넘어 보안 인증을 갖춘 데이터센터, 산업별 테스트베드, 민관 공용 모델 운영 체계 구축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KSMC 같은 공공팹, KIAI 같은 국가 통합 AI 연구소도 이런 목적을 향해 설계될 때 의미가 커진다.
한국이 모든 AI를 다 잘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영역에서 뾰족해질 수는 있다. 범용 모델 순위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안보, 인프라, 제조업 IP를 지키는 추론 주권이다. 한국이 가진 반도체 제조 역량, 메모리 기술, 제조 현장 데이터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을 때, 소버린 AI는 비로소 구호가 아니라 산업과 안보를 동시에 지키는 비대칭 전략이 될 수 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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