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고봉 이후 오직 한사람, 손재 박광일

- 하서·고봉을 이은 오직 한 사람
조선 후기 형조판서를 지낸 이민보는 ‘손재집’ 발문(跋文)에서 “하서 김인후(1510-1560)와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뒤를 이은 오직 한 사람은 손재 박광일(朴光一, 1655-1723)”이라고 평가했다. 하서와 고봉이 16세기 남도를 대표하는 학자였다면, 손재 박광일은 17-18세기 남도를 대표하는 학자라는 것이다.

16세기 남도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시가 문학에서도 꽃을 피운 학문의 르네상스기였다. 면앙정 송순,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사암 박순,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건재 김천일과 송강 정철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김천일·박광옥·최경회 등은 나라를 지키는 의병장이 된다. 의리를 중시했던 남도 성리학은 이후 시대정신을 실천해 내는 ‘정의로움’이라는 남도 정신으로 정착된다.
16세기 남도 성리학은 17세기에도 수은 강항, 우산 안방준, 고산 윤선도 등에 의해 도도하게 이어진다.
그럼에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18세기의 학자 이민보는 ‘손재집’의 발문에서 “호남의 학문은 하서와 고봉에게서 말미암아 백여 년이 됐는데, 고(故) 손재 박공(朴公, 박광일)이 일어났다. 공은 우헌공(寓軒公, 박상현)의 아들로 나이 겨우 약관의 나이에 우암 노선생(송시열)을 사사해 오가며 질문하니, 벌써 영특하기가 남달랐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깊고 은미한 이치를 탐색하고 연구해 정밀하게 사유하고 자세히 논하였다. 저술이 모두 이십 편으로, 성명(性命)의 오묘함과 괘상(卦象)의 이치에서부터 의문(儀文)과 도수(度數)의 세밀함에 이르기까지, 그 견해가 분명했기 때문에 말이 물샐틈없는데, 대부분 질박해 문식(文飾)을 가함이 없고, 광범위하면서도 연원이 있었다. 요컨대 경(經)과 예(禮)의 본지(本旨)를 천명하고자 함이었으니, 문사(文辭)는 애초부터 달가워하지 않았다. 답문이나 소(疏)·변(辨) 등은 또한 장중하면서도 바르고 넉넉하면서도 무성해서, 사문(斯文, 유학자)의 흥망과 크게 관련이 있었기에, 당시 동문의 제공(諸公)들도 마음으로 허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호남의 선비들도 우르르 그를 따르면서 노선생(송시열)의 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편파적인 말에 현혹되지 않았으니, 공(公, 박광일)의 공이 많았도다. 오호라! 비록 하서와 고봉의 뒤를 이은 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어찌 지나치다 하겠는가?”
하서 김인후에 이어 고봉 기대승이 세상을 뜬 해는 1572년(선조 5)이고, 손재 박광일이 태어난 해는 1655년(효종 6)이니 그 사이가 83년, 즉 100여 년 가까이 된다.
이민보의 평가는 한마디로, 손재 박광일이 하서·고봉 이후 ‘제1인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손재 박광일은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 우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다
손재 박광일의 본관은 평양(平陽)이다. 평양은 전라도 순천의 옛 이름이니 지금은 본관을 순천으로 쓴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겸손하고 삼가다’는 뜻을 지닌 손재(遜齋)다. 1655년(효종 6년) 사헌부 장령을 증직받은 우헌 박상현과 장택 고씨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광주 진곡리(광산구 진곡동)에서 태어난다. 부친 박상현은 우암 송시열과 학문을 논할 정도로 유명한 학자였다. 어머니 고씨는 손재를 잉태했을 때 국화가 뜰에 만개하는 태몽을 꿨다고 하니 보통 태몽은 아니었다.
그의 시조는 조선 태종대에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문숙공 박석명(1370-1406)이다. 박석명은 조선 태종을 옹립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진다. 우리 지역 순천과 인연을 맺은 이유다. 그 후 훈봉(勳封)을 세습하다 박이공 때 광주에 낙향하면서, 광주 사람이 된다.
어린 시절 박광옥은 매우 영민했다. 어려서 ‘소학’을 배웠는데, 효제의 도리를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태극도설’(太極圖說) 등을 모두 읽고 깨우친다.
우암 송시열이 장기(포항)에 유배돼 내려오자, 손재는 부친의 명을 받고 직접 송시열을 찾아가 제자가 된다. 손재의 나이 23세였다. 송시열은 손재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기뻐하면서 힘써 큰 학문을 이루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송시열은 성리학에 정진하던 박광일에게 “물을 담더라도 새지 않겠구나(置水不漏)”라고 칭찬했고, 송시열이 조정의 명을 받고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열할 때 손재에게 확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학문이 높아져 세상이 이름이 알려지자, 대신들은 그를 관직에 추천한다. 47세 되던 해에 제수된 내시교관을 시작으로 익위사 시직(48세), 왕자사부(59세), 시강원 자의(63세), 종부시 주부(63세) 등이 그것이다. 6번에 걸쳐 벼슬을 내렸지만, 박광일은 모두 사절한다. 대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해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의 지위에 오른다.
내시교관은 내시들을 교육하고 훈도하는 관직으로 종9품직이었으며, 마지막 제수받은 종부시 주부는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종 6품의 관직이었다.

- ‘남강사’에 배향되다
1689년(숙종 15) 우암 송시열의 상소문이 숙종에게 전달된다.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장씨의 아들 윤(후일 경종)이 두살 때 세자로 책봉되자,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상소였다. 숙종은 진노했고, 상소문이 도착한 이틀 후인 2월3일 제주도로의 귀양을 명한다. 4일에는 위리안치의 명도 추가된다. 당시 제주도로의 귀양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다.
2월8일 한양을 출발한 송시열이 강진에 도착한 것은 2월23일 저녁 무렵이었다.
박광일은 스승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광주 선암역에서 합류해 강진까지 곁을 지킨다.
송시열은 백련사(만덕사)에서 선박을 구해 수리할 동안 2월28일까지 머무른다.
우암 송시열의 강진 백련사 체류는 남도 유생들에게는 일대 사건이었다. 유학자들에게 최고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강진에 온 것은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남도 유림들에게는 대면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강진과 인근 지역 유림이 송시열을 알현하고 가르침을 청하자, ‘태극도설’, ‘중용’, ‘격물’ 등의 주제로 강론한다. 박광일을 비롯한 인근 유생들과의 강론은 생애 마지막 강론이었고, 우암 송시열이 동년 6월8일 정읍에서 사사되면서, 강진은 생애 마지막 종강지(終講地)가 된다.
손재 박광일은 우암 송시열의 특출난 제자로 송시열의 학문과 성리학을 이은 분이다. 송시열이 제주도로 귀양갈 때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광주 선암역에서 강진까지 함께 가 전송했고,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뜰 때도 그의 곁을 지켰다. 스승 송시열과 인연을 맺은 지 14년 만이었고, 손재의 나이 37살이었다. 송시열이 사사된 지 4년 후에 부친상을 당했고, 또 12년 뒤에는 모친상을 당한다.
스승 우암 송시열에 이어 부친마저 세상을 뜨자 손재는 세상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는다. 그가 세속의 관직을 탐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아우 광선과 함께 지리산 문수동(文洙洞)에 들어가 칩거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한다. 고향 광주로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60이 되던 해로, 지리산에 들어간 지 3년 만이었다. 그리고 9년 후인 1723년(경종 3년) 숨을 거둔다. 향년 69세였다. 그의 시신은 광주의 정광산(광산구 고룡동 197번지)에 묻힌다.
강진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 가기 전 박광일 등 제자들과 마지막 강론을 펼친 곳이다.
송시열 사후인 1803년(순조 3), 정읍 고암서원에 봉안된 송시열의 영정을 백련사 영당을 건립해 보관하다, 이듬해 강진읍 평동리에 새 영당을 지어 옮긴다. 그리고 1838년(헌종 4) 주자가 지사로 근무한 중국 강서성 남강(南康)의 지명 이름을 빌려 ‘남강사’로 다시 바꾸는데, 사연이 재미있다.

우암 송시열이 강진에서 생애 마지막 강론을 한 지 120년 후인 1809년(순조 9),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 갈 때 떠났던 강진읍 남포 앞 바다에 나무 궤가 떠밀려 왔다. 그 궤 속에는 ‘주자(주희)’의 ‘경재잠’(敬齋箴) 목판 20매와 ‘대우수전평수토찬집’(大寓手篆平水土贊集) 목판 8매가 있었다.
이 ‘사건’은 송시열이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물증으로 작용했다. 이 일로, 전국 유림의 발의로 주자(정향위)와 우암 송시열(배향위)을 모시면서 이름을 남강사로 바꾼다. 그리고 남포 앞 바다에 떠밀려 온 ‘주자 경재잠’ 목판 20매와 ‘대우수전평수토찬집’ 8매가 남강사에 보관된다.
남강사는 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후 1901년 다시 남강서원으로 복설되고, 1958년 송시열을 강진까지 모신 제자 박광일이 추가 배향된다. 이는 남도에서 손재 박광일이 송시열의 수제자임을 잘 보여준다.
그가 태어난 광주에도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시설이 있다. 그를 기리는 사당 ‘진천사(광산구 고룡동)’가 있고, 도로명 ‘손재로’가 있다. 손재로는 광산구 산정동 성심병원 앞 사거리에서 시작해 안창동 하남 산단 입구 사거리까지로, 길이는 약 5천360m다.



이곳 도로명이 2008년 손재로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손재 박광일이 인근의 진곡마을(현 진곡동)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였던 이재(李縡, 1680-1740)가 남긴 ‘손재 박공 묘갈’(遜齋朴公墓碣)에 나오는 다음 글은 박광일이 어떤 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박광일)은 수려하고 화락(和樂)하며 기상과 도량이 편안하고 중후하였다. 남과 어울릴 적에는 온화하고 관대해서 보기만 해도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항상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지만, 느긋하게 처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손재문집’과, ‘근사록’을 읽고 나서 감상 등을 적은 ‘근사록차기’(近思錄箚記), ‘우암선생 어록’(尤庵先生語錄). ‘나소변무록’(羅疏辨誣錄), ‘진호문답’(晉湖問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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