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적 챌린지’의 10년 뒤 [권태호 칼럼]


권태호| 편집인
이번 6·3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을 전후한 지난달 중순부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쇼츠에 자주 뜨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가 거리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후보에게 불쑥 다가가 “대한민국 주적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습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른바 ‘주적 챌린지’다. 더불어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 범여권 후보들이 갑작스러운 돌발 질문에 영문을 몰라 답변을 피하거나 당황하는 장면을 포착해 ‘종북’이라는 식으로 매도한다. 반면, 국민의힘 후보들이“북한”이라고 답하면 당당하다고 포장하는 식이다.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 박찬대 인천시장 후보, 김상욱 울산시장 후보, 그리고 하정우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 등의 영상이 많이 퍼졌다. 이는 종교·사상 검증을 하는 ‘십자가 밟기’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이를 주도하는 이들이 ‘12·3 내란’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지한 20대 청년 모임인 ‘자유대학’ 등 보수청년 ‘윤 어게인’ 세력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 등 밑도 끝도 없는 7자 단문 구호를 띄우는 식의 선거운동을 한 바 있는데, 그때 등장한 문구 중 하나가 ‘주적은 북한’이었다. 2026년에 ‘주적이 어디냐’고 묻는 이런 퇴행적 행태는 기이하다. 경우는 다르지만, 마치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하기 위해 ‘주고엔(15엔)이라고 말해보라’고 협박하는 상황이 연상된다.
북한을 ‘주적’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한 것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국방백서부터다. 1994년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직후다. 그러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 ‘주적’ 표기 논란 등으로 국방백서를 발간하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다시 발간된 국방백서에는‘주적’ 표현 대신,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으로 표현이 세졌다. 문재인 정부 때는 국방백서에 적을 북한으로 특정하지 않고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로 표현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명박 때 표현을 다시 살렸다. 이처럼 ‘주적’ 표현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리고 ‘주적’이란 표현 자체는 2000년이 마지막이다. 아마도 이재명 정부가 국방백서를 낼 때, 국민의힘을 비롯한 보수층에서는 ‘주적’을 넣느냐 마느냐를 놓고 또 한차례 무가치한 논쟁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도 ‘주적’은 군사용어였다. 일반 국민들까지 ‘주적’을 읊조리는 게 문민 사회에 어울리는 일인가.
청년 극우들의 ‘주적 챌린지’를 정치인들이 활용하는 건 구태다.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가 고재현 국민의힘 성동구청장 후보와 거리에서 마주쳐 악수를 하는데, 이 자리에서 고 후보는 불쑥 정 후보에게 “대한민국 주적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동훈 무소속 부산 북갑 후보는 지난달 23일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민주당 정치인들은 북한이 주적이 아니라고 한다”며 ‘주적 챌린지’ 모음 영상을 올렸다. 지난달 28일 후보자 토론회에선 윤석열 대통령에게 90도 폴더 인사 하는 장면 사진으로 역공을 당하자, 갑자기 화제를 바꿔 ‘대한민국 주적은 누굽니까?’라고 묻는다. 한 후보는 보수를 개혁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주적이 누구냐’가 개혁인가. 공안검사의 취조 행태다. 게다가 ‘주적 챌린지’는 ‘윤 어게인’이 주도하고 있는데, ‘윤 어게인’을 지향하는 것인가. 극우 유튜버 전한길씨가 12월3일 국회에 난입한 김현태 후보(무소속·인천 계양을)와 함께 다니면서 ‘주적은 누구입니까’를 묻고 다닌다.
1020 세대를 연구해온 정민철 세대 커뮤니케이터는 ‘1020 극우가 온다’라는 책에서 1020 세대들이 인스타그램, 게임, 커뮤니티 등을 통해 빠르게 극우 이데올로기에 빠져들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 연장선의 일부가 이 ‘주적 챌린지’인데, 정치권에서 이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정 커뮤니케이터는 “인스타 알고리즘을 ‘윤 어게인’이 장악했다. 청년 세대들이 정치를 에스엔에스로 접하면서 유행처럼 소비한다”며 “플랫폼이 만들고, 알고리즘이 운반하고, 정당이 받아쓴다. 이건 일탈이 아니다. 설계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군에 간 한 20대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훈련소 내무반에 10명 남짓한 훈련병들이 함께 지낸다. 그런데 모두 다 국민의힘 지지하고, 노무현 욕하고, 부정선거 믿더라.” 노 전 대통령을 제대로 알 리 없을 20대 청년들이 일베에서 전파된 이미지를 밈으로, 랩으로 일종의 오락물처럼 갖고 노는 것이다. 엠시(MC)무현이 대표적이다. 아마 ‘내무반과 교실의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도자의 목소리, 절대다수 분위기, 그리고 폐쇄적 공간에서 ‘다른 목소리’를 감히 내지 못할 것이다. 20대가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편향적 정보 습득 구조 등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10년 뒤 후보자가 아닌 일반 시민이 출근길에 “주적이 어딥니까?”라는 질문을 맞닥뜨리는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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