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바이올리니스트 옆에 천사표 첼리스트...그 기묘한 시너지

아르떼 2026. 6. 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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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세열의 지음(知音)
야샤 하이페츠 &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꼿꼿이 선 채 높이 치켜든 바이올린, 무표정한 얼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의 연주는 눈부신 기교에도 불구하고 종종 ‘차갑다’는 평을 듣는데, 여기에는 특유의 이미지도 지분이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의 무뚝뚝한 모습처럼, 하이페츠는 그리 사교적이지 않았다. 예민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때로는 냉혹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동료가 있었으니, 바로 ‘그리샤(Grisha)’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 1903~1976)였다.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두 대가의 우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졌다.

서방을 사로잡은 두 신동

피아티고르스키는 자서전 『첼리스트』(1965)에서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하이페츠라는 이름은 전설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회고처럼 하이페츠가 누린 위상은 신화적이라 할 만했다. 12살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은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이제 우리 바이올린을 무릎으로 부숴버려야겠군”이라고 농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3살 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극찬받았고, 10대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에 비해 피아티고르스키의 경력은 구불구불하게 발전했다. 독일로 망명한 뒤 카페에서 연주하며 생활비를 벌기도 했으며, 초기에는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활동에 주력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1916년 모스크바에서 하이페츠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으나,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1925년 독일에서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첼로 수석으로 있던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비공식 실내악 모임을 자주 열었다. 크라이슬러, 엘만, 시게티, 포이어만, 슈나벨, 기제킹 등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모임에 참여했고, 하이페츠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루는 피아티고르스키가 하이페츠에게 플라잉 스타카토(여러 음을 한 활로 짧게 튕기는 주법)가 어렵다고 토로했는데, 하이페츠와 이 주법을 연습한 지 불과 20분 만에 문제가 해결됐다고 한다. 하이페츠는 훗날 디니쿠의 ‘호라 스타카토’를 그를 위해 편곡하기도 했다. 피아티고르스키의 멋진 스타카토 솜씨를 보여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우정은 미국으로 이어졌다. 1917년 미국 망명 후 카네기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하이페츠보다는 늦었지만, 피아티고르스키 또한 1929년 첫 미국 순회공연에서 찬사와 함께 빠르게 스타덤에 올랐다. 두 사람의 독점 레코드사였던 RCA가 협업을 적극 주선했다.

하이페츠 장군, 피아티고르스키 제독

하지만 하이페츠는 이상적인 실내악 파트너는 아니었다. 그의 강렬한 개성은 함께하는 동료들을 압도해버리곤 했다. 하이페츠가 선호했던 빠른 템포와 공격적인 표현, 과장된 글리산도는 앙상블에 융화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의 비타협적인 성격은 곧잘 불화를 낳았다. 그가 아끼던 제자이자 반주자였던 아이케 아구스에 따르면, 하이페츠는 “과거에서 걸어 나온 절대군주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이페츠, 피아티고르스키와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이 함께했던 이른바 ‘백만불 트리오’는 첫 연주회를 연 지 약 1년 만에 해체되었다. 성격 좋은 피아티고르스키는 다른 두 사람과 잘 지냈지만, 하이페츠와 루빈스타인은 원수지간이 됐다. 루빈스타인은 자서전에서 하이페츠에 대해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완전히 끔찍하다”고 썼다. 예민한 하이페츠는 공연 홍보물도 문제 삼았다. 루빈스타인-하이페츠-피아티고르스키 순으로 이름을 싣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 전설적인 트리오에서 연주하는 것이 어땠냐고 한 피아니스트가 묻자, 피아티고르스키는 “그들은 내가 쥐처럼 연주하길 원했어!”라고 답했다. 한번은 녹음 세션 중 하이페츠가 연주를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밸런스가 완전히 틀렸네. 첼로가 들리잖소.”

놀랍게도 하이페츠와 피아티고르스키의 협업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함께 연주한 작품만 70곡이 넘고, 그중 약 50곡이 녹음되었다. 갖은 ‘막말’에도 하이페츠와 끈끈한 사이를 유지했던 피아티고르스키의 인품에 감탄하게 된다. 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 1904~1982)는 1957년과 1960년에 두 사람과 베토벤 현악 삼중주 다섯 곡을 녹음했는데, ‘백만불 트리오’ 때와 달리 이 트리오 작업이 꽤 원만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이페츠는 그리샤의 말을 매우 주의 깊게 들었다. 그를 가장 존경했기 때문이고, 그의 가장 가까운 관계가 피아티고르스키와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두 거장의 연주는 비르투오소들의 실내악이 흔히 보이는 대결 구도에 있지 않았다. 피아티고르스키의 전기를 쓴 테리 킹은 그가 “하이페츠의 고도로 충전된 프레이즈 속에서도 음악적 순간을 이완시킬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러한 순간들이 녹음보다 공연에서 더 분명히 드러났다고 했다. 평론가 헨리 로스는 하이페츠가 남긴 브람스 이중 협주곡 앨범 중, 1939년 에마누엘 포이어만과의 녹음보다 1960년 피아티고르스키와의 녹음이 “앙상블 연주로서 더 우수하다”고 평했다. 하이페츠가 한결 원숙해진 모습으로 파트너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 그는 피아티고르스키의 연주를 “고집 센 형제에 대해 부드럽고 애정 어린 인내를 보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이른바 ‘하이페츠 현상’에 대처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분명히 터득한 듯하다. [...] 그는 자신의 거대한 개성을 굳건히 드러내지만, 동시에 악기 간 난투극 같은 충돌은 철저히 피한다.”

[브람스, 이중 협주곡, 1960]

두 친구는 서로를 ‘하이페츠 장군’과 ‘피아티고르스키 제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근접 전투에 뛰어드는 육군(장군)과 먼발치 바다에서 묵직한 포격을 지시하는 해군(제독). 이들이 앙상블에서 맡았던 역할과 퍽 닮은 별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노년을 지탱하다

빡빡한 순회 연주로 피로가 누적됨에 따라, 하이페츠와 피아티고르스키는 1950년대 중반부터 연주 횟수를 줄여나갔다. 피아티고르스키의 어깨 염증, 하이페츠의 고관절 골절도 영향을 미쳤다. 대신 교육의 비중이 늘어났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를 거쳐, 1960년대 초 나란히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의 교수진으로 합류하게 된 것.

지근거리에 살았던 두 사람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해 정기적으로 실내악을 연주했다. 이는 1961년부터 ‘하이페츠-피아티고르스키 콘서트’로 이어졌다. 1972년까지 이어진 이 시리즈 공연은 미국 서부 음악계의 활력소가 되었다. 세계적인 대가들은 물론 지역 음악가들, 하이페츠-피아티고르스키 클래스의 학생들도 종종 참여했다. 집에 초청된 음악가들과의 사적인 초견 연주가 일종의 오디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공연 뒤에는 같은 구성으로 RCA의 녹음이 이어졌다.

하이페츠-피아티고르스키 콘서트는 젊은 시절 피아티고르스키의 아파트에서 열렸던 실내악 모임을 더 확장된 형태로 시도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커리어의 마지막을 부드럽게, 서로 지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매듭짓는 그들만의 방법이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하이페츠에게 바이올린이 없다면 그는 자기파괴에 빠질 것’이라 말하곤 했으며, 피아티고르스키는 공연 일정이 없으면 연습하기보다 친구들과의 초견 연주를 즐겼다 한다.

시리즈가 마무리된 후에도 두 사람은 이따금 USC의 학생 리사이틀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1974년 있었던 할보르센의 ‘헨델 주제에 의한 파사칼리아와 사라방드’ 연주가 두 친구의 마지막 공개 협연이 되었다.

[할보르센, 헨델 주제에 의한 파사칼리아와 사라방드 ,1963]

골초였던 피아티고르스키는 1976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이페츠는 피아티고르스키의 아내에게 전화해 너무 충격을 받아 추도식에 참석할 수가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친구의 죽음 후 하이페츠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더 은둔적으로 변했다. 그의 말년은 쓸쓸해 보였다.

두 음악가의 위촉으로 이중 협주곡을 쓰기도 했던 영화음악 작곡가 미클로시 로자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샤는 야샤를 절대적으로 숭배했다. [...] 모든 사람이 하이페츠에게서 무언가를 원했지만, 그리샤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하이페츠의 사랑이었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피아티고르스키가 죽었을 때 나는 야샤가 몹시 안쓰러웠다. 그가 자신의 유일한 진짜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임세열 칼럼니스트



참고문헌
● Piatigorsky, Gregor, Cellist, Doubleday and Company, 1965
● King, Terry, Gregor Piatigorsky: The Life and Career of the Virtuoso Cellist, McFarland, 2010
● Axelrod, Herbert, Heifetz, Paganiniana Publications, 1990
● Agus, Ayke, Heifetz as I Knew Him, Amadeus Pres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