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많아 읽기 힘들어요”...여전히 눈총받는 ‘발달 장애인’의 느린 투표

“민지야, 얼른 도장 찍고 나와야지. 얘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지난달 19일 엄마 전종미(57)씨는 뇌병변 지적 장애가 있는 딸 박민지(29)씨와 함께 경기 과천시 문원동의 한 사전 투표소를 찾았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 기표소에 들어간 딸이 10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아 줄을 선 다른 시민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전씨는 “딸이 스스로 투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투표소에 데리고 갔지만, “왜 안 나오지?”하는 시민들의 표정을 보니 스스로 눈치가 보였다”고 했다.
올해 열린 제9회 6·3 지방선거는 딸 박씨에게 3번째 투표였다. 우여곡절 끝에 투표장을 나선 엄마 전씨가 “민지야, 투표를 좀 빨리 할 수는 없었을까?”라고 묻자, 박씨는 “글자가 많으니까 읽는 게 힘들었어”라고 답했다. 전씨는 “발달 장애인들이 투표를 할 때, 도움이 필요한지 옆에서 물어본다든지, 놀이공원처럼 줄을 따로 설 수 있게 해주는 식의 도움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점자 투표 용지나 투표 보조인 등 선거와 관련해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시각·신체 장애인 등과 달리, 발달 장애인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후보자들의 공약을 빼곡하게 담은 공보물은 발달 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데다, 기표소에 보조인과 함께 들어갈 수도 없다. 현행 공직선거법이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만 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씨 같은 발달 장애인들은 기표소 안에서 투표 용지를 이해하는 것 자체에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도장을 제대로 찍지 못해 사표 처리가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특히 지방선거의 경우, 대선이나 총선과 달리 각 지자체별로 투표해야 할 후보자가 많아 발달 장애인들이 투표에 어려움을 겪는다. 김광옥 과천장애인복지관 국장은 “사전에 연습을 하더라도 후보자들의 공약을 제대로 숙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며 “부모님이 선호하는 사람을 찍으라고 하시는 경우도 있어 발달 장애인들의 참정권 보장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이에 일부 장애인복지관은 자체적으로 발달 장애인을 대상으로 선거 관련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최근 종로장애인복지관에서는 종로구 후보들의 공약을 스크린 화면에 띄어놓고, 화이트보드에 짧은 단어와 그림 등을 이용해 공약을 쉽게 설명하는 교육이 진행됐다. 교육을 담당한 권수빈 장애인재활상담사는 “후보들의 공약이 대부분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다보니 장애인들의 이해 수준에 맞게 쉽게 풀어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며 “정부가 나서서 후보들의 공약을 쉽게 설명해주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투표를 앞두고 최근 과천장애인복지관에서는 모의 투표가 진행됐다. 사회복지사들이 각각 ‘앞마당’ ‘퐁당퐁당’ ‘포도당’ ‘위풍당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롯데월드로 소풍을 가겠습니다” “맛있는 요리 활동을 추가하겠습니다” 등의 공약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진 뒤, 발달 장애인들이 실제 기표소와 유사한 공간에서 도장을 찍는 연습을 했다.
한편 한국피플퍼스트 등 장애인 단체는 지난 2023년 발달 장애인의 투표 보조를 거부한 것은 차별 행위라며 국가를 상대로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냈지만, 아직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다. 1, 2심 재판부는 “투표 보조를 거부한 행위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간접 차별에 해당한다”고 봤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상고를 하면서다. 2022년에는 발달 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쉬운 투표용지’를 만들어달라는 소송도 제기됐지만 이 역시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그 결과 장애인들의 투표권은 비장애인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실정이다. 지난 2022년 치러진 20대 대선 당시 전국 최종 투표율은 77.1%를 기록했지만, 발달 장애인에 포함되는 지적 장애인은 55.1%, 자폐성 장애인은 53.7%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발달 장애인들의 참정권이 의미 있으려면 무엇보다 공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투표 과정에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전지혜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쉬운 공약집 등 발달 장애인을 위한 자료 배포가 공식화될 필요가 있다”며 “이는 장애인뿐 아니라 인지의 제약이 찾아오는 노인분들에게도 공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전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사회는 발달 장애인에 대한 ‘조력’ 보다는 ‘대리’에 치우쳐진 경향이 컸다”며 “투표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발달 장애인의 선택과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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