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깐부' 된 한국·엔비디아…반도체 넘어 피지컬 AI로 [AI칩 인사이드]
AI PC·휴머노이드 시대, K기업 수혜 기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다시 한국을 찾는다. 7개월 전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당시 강남의 치킨집 회동으로 전세계 IT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이번엔 성수동 삼겹살집과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거론된다. 격식없는 '캐주얼 외교'로 보이지만, 엔비디아가 한국과 그리는 미래는 더 커졌다. 지난 번엔 공급망 구축을 위한 관계 다지기였다면 이번 방한은 협력의 무대를 반도체를 넘어 로보틱스와 스마트팩토리, 자율주행으로 확장하는 전환점에 가깝다.
■ 에이전틱 AI 시대, 엔비디아의 다음 전장은 '로봇'
젠슨 황 CEO는 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코리아 파트너 나이트' 현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로봇 산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엔비디아가 한국 로보틱스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관심있게 보는 분야를 묻는 질문에 로보틱스를 직접 언급한 것이다. 투자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항상 검토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 발언을 단순히 형식적인 대답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이유가 있다. 황 CEO는 앞서 컴퓨텍스 2026 기조연설에서 "에이전틱 AI의 형태로 쓸모있는 AI가 마침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그가 정의한 에이전틱 AI는 질문에 답하는 수준이 아니다. '이해하고 추론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며 도구를 사용하는 디지털 로봇'에 가깝다. AI 산업의 중심이 데이터센터를 넘어 실제 공장과 물류센터, 자동차, 로봇이 움직이는 현실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엔비디아의 전략 변화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엔비디아는 GPU 공급업체를 넘어 로봇 시뮬레이션 플랫폼 '옴니버스', 로봇 개발 플랫폼 '아이작', 휴머노이드 AI모델 '그루트'를 아우르는 AI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AI가 현실세계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 반도체 설계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제조 인프라와 실증 현장, 실제로 작동시킬 수 있는 로봇과 자동차 등이 필요하다. 한국은 반도체와 전자, 자동차, 배터리 산업 등 그 모든 조건을 동시에 갖춘 대표적인 나라다.
■ 왜 한국인가..엔비디아가 찾은 AI 파트너
이번 황 CEO의 방한 일정을 살펴보면, 엔비디아의 다음 행보가 드러난다. SK그룹은 HBM과 AI 인프라,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SDV(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LG그룹은 로봇과 AI팩토리, 네이버는 디지털트윈과 클라우드 인프라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과거 협력 중심이 AI 서버용 GPU와 HBM 공급망이었다면 앞으로는 피지컬 AI 생태계 전반으로 협력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LG그룹은 엔비디아의 휴머노이드 AI 모델인 그루트를 기반으로 자체 피지컬 AI 모델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LG전자는 로봇 사업 확대와 함께 로봇의 관절 역할을 하는 액추에이터 양산 체계 구축도 추진 중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LG AI연구원의 엑사원, LG이노텍의 센싱 기술, LG유플러스의 클라우드 인프라 등으로 협력 범위가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두산로보틱스는 엔비디아와의 협력이 가장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업 중 하나다. 지난 4월 황 CEO의 장녀이자 엔비디아 옴니버스·로보틱스 제품 마케팅을 총괄하는 매디슨 황 수석 이사는 경기도 성남 두산로보틱스 이노베이션센터를 직접 방문했다. 당시 양사는 두산로보틱스가 개발 중인 에이전틱 로봇 운영체제와 엔비디아의 AI·로보틱스 시뮬레이션·학습 인프라를 연계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사는 이를 기반으로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 가능한 로봇 실행 플랫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는 2027년 에이전틱 로봇 운영체제 기반의 지능형 로봇 솔루션을 선보이고, 2028년에는 산업용 휴머노이드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황 CEO가 방한 기간 잠실야구장 두산 베어스 홈경기 시구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과의 회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시선이 쏠린다.
네이버 역시 주목받는 기업이다. 성남 제2사옥 '1784'는 디지털트윈과 클라우드, 로봇이 실제 업무 공간에 적용된 대표 사례다. 황 CEO가 방한 기간 중 네이버 방문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양사 간 협력 논의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주목된다.
■ 공급망 넘어 플랫폼 동맹…한국과 'AI 깐부' 진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여전히 핵심 축이다. 피지컬 AI가 확산될수록 로봇과 자율주행 시스템의 학습·추론 수요가 늘어나고, 이는 GPU와 HBM 수요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공급하는 반도체 기업들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특히 엔비디아의 AI 생태계 확장은 데이터센터에만 머물지 않는다. 황 CEO는 이번 컴퓨텍스에서 AI PC용 플랫폼인 'RTX 스파크(RTX Spark)'를 공개하며 본격적인 PC 시장 공략도 선언했다. 해당 플랫폼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LPDDR5X 메모리가 탑재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AI PC 보급이 확대될 경우 서버용 HBM뿐 아니라 고성능 저전력 D램 수요까지 함께 늘어나면서 국내 메모리 업계의 수혜 범위가 한층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엔비디아가 PC 시장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건 의미가 크다"며 "AI가 PC에서 잘 구동된다면 침체됐던 PC 시장이 다시 주도권을 쥘 수 있고, 삼성과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메모리 수요처가 서버를 넘어 클라이언트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경주 APEC 당시 삼성전자와 SK그룹, 현대차그룹은 각각 최대 5만 개 규모의 엔비디아 GPU 도입 계획을 발표했고, 네이버 역시 6만 개 이상의 GPU 확보 계획을 공개했다. 당시 협력이 AI 인프라 구축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번 방한은 그 협력을 실제 산업 현장과 로보틱스로 넓히는 과정이다.
생성형 AI가 데이터센터 안에서의 경쟁이었다면, 피지컬 AI의 무게중심은 제조 현장과 로봇, 자율주행으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와 제조, 자동차 산업을 모두 갖춘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이유나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