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 겹치는 추락의 궤적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946년생인 도널드 트럼프보다 1952년생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연하지만, 권력자로서는 2000년부터 대통령이 된 푸틴이 트럼프에 비해 한참 선배다. 운동으로서의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형성되기도 전에 푸틴은 이미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를 열심히 실천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소련 붕괴 이후 탈산업화되고 세계적 위상을 상실한 러시아를 다시 ‘대국’의 반열에 올리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가동된 지도 이제 어언 20여년이 됐다.
이 정도의 시간이 경과된 뒤면 역사적 판단을 어느 정도 예비적으로 내릴 수 있다. 러시아의 경제가 다소 성장하고 군사력이 증강되었으며 관료제가 재정비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몰락과 1990년대의 추락은 끝내 반전되지 않았다.
첫째, 가치관의 차원에서 소련은 평등을 지향한 사회였다. 이 가치가 물론 완벽하게 실현된 건 아니었지만, 후기 소련은 그 당시 스웨덴 정도로 지니계수가 양호했다. 반면 소득 격차가 이제 거의 미국만큼 벌어지고 최상위 1%의 사회적 부 집중 차원에서는 아예 미국보다 불평등이 더 심한 오늘날 러시아는 재분배와 평등 대신 공격적 민족주의나 ‘전통 가치’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런 구시대적 사상들은 국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젊은이들에게도 주로 외면을 받는다. ‘연성 권력’(소프트 파워) 차원에서 오늘날 러시아는 ‘혁명’의 아우라를 가졌던 소련과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둘째, 경제·사회 차원에서 1990년대의 추락은 소련 시대 제조업의 몰락과 한때 미국과 쌍벽을 이루었던 과학계의 치명적 위기 등을 의미했다. 한데 지난 26년 동안 러시아의 제조업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에서 14%로 더 떨어졌을 뿐이다. 러시아 과학계 역시 1990년대의 추락 이후 만성적 침체와 쇠락의 늪에 빠졌다. 연구자들의 수는 이제 한국에도 못 미치고,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된 총 연구 예산은 한국의 절반도 안 된다. 중국이나 미국과의 비교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셋째, 현 러시아 정권은 이와 같은 장기적 쇠락을 반전시키지 못한 채, 2000년대 말 이후부터 전쟁 승리를 통해 민심을 획득하고 국내외에 ‘위엄’을 떨치려고 했다. 처음에는 2014년의 크림반도 합병처럼 일부 군사작전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한데, 더 약한 이웃 나라에 대한 이런 군사작전의 성공에 기고만장해진 현 러시아 정권이 2022년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전을 개시했을 때, 성패 예측을 한참 잘못했다. 제국주의적 침공은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회의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서방의 지원에 힘입기도 한 저항력을 역으로 높였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의 늪에 빠진 러시아는 이제 4년 이상 수많은 인명과 돈, 그리고 국제적 권위와 비군사 부문 발전의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해 침체와 쇠락이 급속한 추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단순 비교가 가능한 나라는 물론 아니다. 경제 규모로 보나 국제적 위상으로 보나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한데 지금 트럼프는 푸틴 정권의 모든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미국이 이와 같은 궤도를 계속 밟는다면, 그 궁극적 도달점은 역시 오늘날 러시아를 연상케 할 급속한 추락일 것이다.
첫째, 가치관의 차원에서 미국은 개방성과 세계 각국의 인재 유치 등을 지향한 사회였다. 완벽하게 개방적인 사회는 아니었을지라도, 무려 15%의 미국인이 외국 태생의 1세 이민자들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절반 정도가 외국 태생이라는 사실로 봐도, 이 개방성은 미국 경제 발전에 핵심적 구실을 해왔다. 한데 트럼프의 초강경 반이민 정책의 결과로, 지난해 미국을 떠난 이주자 수는, 미국에 온 이민자 수보다 더 많았다. 미국 경제와 사회의 버팀목을 트럼프가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개방성 대신 트럼프 역시 푸틴 못지않게 공격적 민족주의나 ‘전통 가치’를 내세우지만, 마가 추종자들은 미국 사회 안에서도 결국 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국외에서의 소프트 파워를, 트럼프의 미국은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다.
둘째, 경제·사회 차원에서 미국의 점차적인 쇠락이란 제조업의 공동화와 최첨단 기술 연구 분야에서 중국에 추월당함 등을 의미했다. 한데 트럼프의 고율 관세 도입 등의 혼란과 실정으로 작년 한해에만 미국 제조업 일자리가 10만개 가까이 증발하는 등 위기는 깊어졌을 뿐이다. 트럼프 정권의 연구비 삭감 등으로 최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미국은 이제 더욱더 중국에 밀린다. 과학·기술 분야 세계 최고의 100개 대학 중 이제 중국 대학은 42개나 되는 반면, 미국 대학은 36개에 불과하다.
셋째, 미국의 장기적 쇠락을 엄청나게 가속화한 현 트럼프 정권은 그 실패를 전승을 통해 덮어보려고 했다. 처음에는 올 1월의 베네수엘라 대통령 납치 작전 등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한데, 약소국에 대한 이 ‘승리’에 기고만장해진 트럼프가 다음에 이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을 때, 성패 예측을 한참 잘못했다. 제국주의적 침공은 오히려 이란 사회의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결국 호르무즈해협을 이란 손에 넘기고 걸프 지역의 동맹국들을 지키지도 못한 미국의 경우, 명분 없는 침략으로 인한 쇠락이 급속한 추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푸틴과 트럼프는 각각 러시아와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군사 부문의 팽창을 통해 극복하려 해왔다. 둘 다 복고적 가치를 지향하고 둘 다 공격적 민족주의를 신봉해왔다. 둘 다 전쟁을 통해 내부 위기 국면을 타개하려다 실패하여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둘 다 과학 연구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고, 둘 다 기후위기 등 인류의 진정한 미래지향적 의제에 신경을 쓴 적도 없다. 둘 다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해 있으며, 둘 다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면서 그 나라들을 각각 더 깊은 쇠락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 러시아도 미국도 지난 몇년 동안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렸다가 최근에 그 추락이 가속화됐다. 이 두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비참한 광경들은 앞으로도 계속 연출될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이름 대신 ‘1번’…20대 희생자 2명, 입사 석달밖에 안된 계약직이었다
- 오늘, 내 삶을 바꿀 후보 누구입니까
- “스타벅스 매장서 ‘조롱·혐오’ 닉네임”…5·18단체 “제한해야” 촉구
- 하정우 “일할 사람” 박민식 “북구 사람” 한동훈 “보수 재건”
- 고교생 성폭행 하려다 살해…장윤기 ‘강간 살인’ 혐의 구속기소
- ‘츄파춥스님’ 극락왕생 하소서…생전 30억 기부하고 ‘보리’ 곁으로
- 젠슨 황 “한국 로보틱스 투자 검토”…삼성전자 성과급도 언급
- 이 대통령 “검찰, 잘못하면 취소해야”…국힘 “대놓고 본인 공소취소 협박”
- 이승환 “구미 세금으로 배상금 지연 이자 12%…내가 다 아깝다”
- “미쳤냐!” 트럼프, 네타냐후에 폭발…“나 아니었으면 감옥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