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임진왜란 트라우마에 풍수가 결합…동묘의 탄생은 ‘힙’하지 않다[장지연의 역사 상상력]

조선 태조가 한양도성 쌓을 때
‘허약한 동쪽’ 큰 문제 안됐지만
임진왜란 직후 수면 위로 거론
참전 명장수들 관우 사당 추진에
전란 책임 의식한 선조, 풍수 활용
“지세 보완하려면 동쪽에 지어야”
조선 왕들 왕릉 갈 때 으레 방문
명나라에 대한 의리 되새긴 공간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한양도성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조정에서 한양에다) 외성을 쌓으려고 했는데, 둘레의 범위를 미처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에만 (눈이) 쌓이고 안쪽에는 녹아버렸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습이다. 비록 산세를 따라 성을 쌓기는 하였지만, 정동쪽과 서남쪽이 낮고 허하다. 게다가 성 위에 작은 담을 쌓지 않았고 해자도 파지 않았다. 그래서 임진년과 병자년 두 난리 때에 모두 지킬 수가 없었다.”
이 글에서는 당대 대중적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산세를 따라 정한 성곽이 정동쪽과 서남쪽이 낮고 허한 지세상의 결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 때 도성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처럼 한양도성은 지형적으로 서남쪽과 정동쪽이 허약한 구조였다. 특히 조선인들이 골머리를 앓은 곳은 바로 동편이었다. 한양도성은 풍수적 용어로는 사신사라고 불리는 네 개의 산 능선을 연결하며 축조됐는데, 주산인 북쪽의 백악,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 안산인 남쪽의 목멱산(남산)이 250~350m 사이의 높이를 지닌 데 비해 좌청룡인 동쪽의 타락산(낙산)은 125m로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도성 축조 당시 태조가 직접 현장을 살필 만큼 동쪽의 낮은 산세는 우려의 대상이었으나, 이것이 당장 심각한 문제로 비화하지 않았다. 세종 대 최양선의 상언(上言)으로 주산 논쟁이 불거졌을 때도 주산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였지, 낙산의 산세가 쟁점이지는 않았다. 동쪽의 낮은 산세를 보완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작은 산이나 숲을 조성하기는 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문제로 인식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바로 임진왜란이라는, 건국 200년 만에 겪은 초유의 전란 때문이었다.

동관왕묘와 도성의 풍수
한양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을 나와 동쪽으로 700여m를 걸어가면 동묘가 나온다. 요즈음은 구제 의류와 각종 중고 물품들이 거래되는 벼룩시장으로 더 유명한 동묘는 16세기 조선 선조 대 건설된 동관왕묘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동대문에서 걸어서 10여분, 북쪽으로 해발 95m 정도의 나지막한 동망봉이 보이고, 남쪽으로 청계천이 흐르는 곳에 있는 동관왕묘. 이곳의 입지는 조선의 선조가 결정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장수들은 조선에 <삼국지연의>의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관우는 무장들의 성인이자 상인들의 재물신으로 중국에서 널리 추앙받았으나, 조선에서는 낯선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에 명 장수들이 주도해 남산 밖에 관왕묘를 건립하니, 이것이 훗날 남관왕묘 혹은 남묘라 불리게 되는 첫 관왕묘다.
명 장수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 더 건설하려고 남관왕묘 인근을 후보지로 고려한다. 하지만 선조는 이곳 대신 동대문 밖 조산(造山·인공적으로 조성한 산)이나 성안 동편의 훈련원 근처로 할 수 있도록 알아보라고 명한다. 선조는 “중국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다”, “동방이 길한 곳”이라고 한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도성의 동편에 관왕묘를 건설하고자 했다(<선조실록> 선조 32년 4월29일).
선조가 중국 사람에게서 들었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며칠 후 기사에 그 단서가 나온다. “전에 유황상이 우리나라 도성은 동편이 허한 듯하니 건물을 세우고 못을 파서 지맥을 진압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선조실록> 선조 32년 윤4월7일). 유황상은 임진왜란 때 군무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명군과 함께 파견된 이다. 그가 한양도성의 지세 문제, 특히 동편이 허하다는 문제를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미 몇년 전부터 선조는 도성과 곳곳의 풍수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전란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선 1594년(선조 27) 무렵부터 풍수를 잘 아는 명나라 사람을 찾았고, 그렇게 소개받은 이가 섭정국이었다. 선조는 믿을 만한 관료 몇몇을 붙여 섭정국과 함께 궁궐터를 비롯한 여러 곳의 지세를 시찰하게 했는데, 특히 도성이 너무 커서 10만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지킬 수가 없다며 도성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다(<선조실록> 선조 27년 5월20일). 자신이 도성을 지키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언설, 파천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도성의 지리적 한계로 돌리려는 자기방어 기제가 아니었을까.
동관왕묘를 건설할 때, 선조는 초조했다. 관왕묘 추가 건립은 지세가 허한 도성의 동편을 보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혹시 명 장수들이 반대하지는 않을까, 제대로 의사를 타진해보기도 전에 남대문 밖 후보지에 먼저 공사가 시작되면 어쩔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다급히 관료들을 닦달했는데, 다행히도 명 장수들은 추가로 건립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위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동대문 밖의 입지도 좋다고 흔쾌히 동의하자 동관왕묘는 순조롭게 완공을 보게 된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동관왕묘의 지세에 대한 당대의 설명은 이러하다. “(이렇게 정하면) 후면이 높은 산맥과 바로 연결되고 또 조산과 가까우니, 바로 수구를 잠그듯 막아주는 곳입니다.”(<선조실록> 선조 32년 7월14일) 한양의 수구인 동망봉과 청계천 사이, 지금 동관왕묘의 입지에 딱 부합하는 서술이다.
초유의 전쟁으로 인한 불안감과 그 이유를 찾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근저에 도사렸을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 등은 도성의 지세와 풍수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다. 이는 특히 도성 동편의 낮은 지세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이며, 지금의 위치에 관왕묘의 창건을 끌어냈다. 조선 관왕묘의 창건은 명 장수들의 주장에서 비롯했으나, 지금 우리에게까지 계승된 ‘동관왕묘의 입지’는 선조의 강력한 의사와 추진으로 정해진 것이다.

잊혀버린 동관왕묘의 풍수 이야기
선조가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동관왕묘의 입지를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건립 당시의 풍수 논의나 설화가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도성 동편의 허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동대문의 현판에 ‘之’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했다는 설화 같은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음에도 왕성히 전파된 데 비해, 동관왕묘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몇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선조와 광해군에 대한 평가의 차이다. 광해군은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설을 믿고 도성 안에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을 건설하는 등 풍수에 집착해 재위 기간 내내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는 인조반정 때 그가 쫓겨나야 하는 대표적 이유로 꼽힌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록을 보면 선조의 풍수 집착도 광해군 못지않았다. 선조는 명 출신 풍수가를 신뢰하며 곳곳의 풍수를 보아달라고 부탁하고 그 말에 혹했다. 그런데도 사관들은 선조 대의 풍수 문제는 신하의 책임으로 돌린 반면, 광해군에 대해서는 ‘(임금이) 이처럼 기이한 술법에 현혹되어 민력을 돌보지 않았다’며 임금 자신을 공격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3월16일). 이러한 서술의 차이가 동관왕묘와 풍수에 대한 기억을 퇴색시키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다음으로는 후대 동관왕묘의 의미가 바뀌었다는 데 있다. 훗날 관왕묘의 제례가 정비되면서 동관왕묘는 그 입지보다는 임진왜란 때 건립됐다는 내력이 더 중시된다. 특히 숙종 대 이후에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에 대한 의리를 되새기는 장소로 의미가 부여된다. 숙종은 관왕묘를 배알하는 것을 관행화했고, 영조와 정조는 그러한 관심을 계승하고 확장해 국가의 예전(禮典)에 이를 정식으로 등재한다. 정기적으로 국가 제례를 드려야 하는 곳으로 정했다는 의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관왕묘는 교외의 왕릉을 찾는 후대의 국왕들이 으레 방문하는 장소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국왕들이 이곳에서 명에 대한 의리를 되새긴 반면, 조선에 온 청 사신들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기념했다는 사실이다. 동관왕묘와 남관왕묘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후대에 조선의 국왕이나 청 사신처럼 권력자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의미가 덧칠되자 이곳의 창건기 풍수 이야기는 점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차라리 후대에 잊힌 공간이 되었다면 초기의 서사가 더 잘 살아남았을까? 이제는 창건기는 물론이고 후대의 서사까지 묻힌 채 동관왕묘는 ‘힙스터 성지 동묘 ’로 새로운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힙한’ 노점으로 둘러싸인 동관왕묘는 전란의 트라우마와 도성 지세를 보완하려 했던 당대의 풍수적 심성이 새겨진 가장 생생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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