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두 국가’의 명칭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2026. 6.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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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다.
상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언어다
한국과 조선이란 두 이름이 영원한 분리의 상징이 될지,
경쟁과 공존의 새로운 관계 출발점이 될지는 아직 안 정해졌다
어쩌면 한반도의 미래는 국경선의 위치보다는
서로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원에서 열린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에서 북한의 ‘내고향’ 팀이 일본의 ‘도쿄 베르디 벨레자’를 꺾고 우승했다. 오랜만에 남한 땅에서 남북 팀이 맞붙은 준결승전도 열렸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스포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앞으로 한반도가 안고 갈 과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북한 선수단이 여행증명서 대신 여권을 사용한 것에서부터 우승 직후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이번 만남은 과거 상봉의 기쁨보다는 긴장과 거리감이 두드러졌다. 특히 한 기자가 ‘북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내고향’ 팀 감독이 불쾌감을 표시하며 회견장을 떠났다는 보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단순한 언어 습관의 충돌이 아니다. 상대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떤 정치적 존재로 인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다. 명칭은 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추진했던 ‘남북해외학자 통일회의’를 떠올리면 더욱 실감이 난다. 이 회의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다섯 차례 베이징에서 열렸고, 2003년에는 평양에서 여섯 번째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참가자들은 서로 ‘남측’ ‘북측’ ‘해외 측’이라고 불렀다. 간혹 ‘남조선’이나 ‘북한’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지만, 관행적인 언어 사용으로 서로 이해했고 특별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지난 30년 동안 남북관계는 희망과 실망, 화해와 갈등 사이를 오갔다. 그러나 지금처럼 관계의 기반 자체가 흔들린 적은 드물었다. 남한에서는 정권 교체에 따라 대북정책의 연속성과 단절이 반복되었고, 윤석열 정부 이후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무거운 유산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2017년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고, 2018년 남북정상회담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2023년 말부터는 ‘적대적 두 국가’라는 개념이 점차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두 국가 공존으로 재구성

이러한 변화 속에서 최근 개정된 북한 헌법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국호와 영토 조항이 정비되고 조국통일 관련 조항은 삭제되었다. 국무위원장을 국가수반으로 규정하고 핵무력 지휘권을 명문화한 점도 주목된다. 이는 단순한 조문 수정이 아니다. 북한은 더 이상 자신을 미완의 통일국가 일부로 규정하지 않고 하나의 완결된 주권국가임을 헌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대한민국 헌법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규정한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 개념과도 충돌한다.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법과 제도의 차원을 넘어 상대를 부르는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남측과 북측 대신 대한민국(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라는 국가 명칭으로 변했다.

이는 통일 담론의 탈민족화와 남북관계의 국제화를 향한 역사적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북한 지배층의 고육지책으로 해석하고, 또 다른 일부는 김정은 체제의 세습 안정화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북한은 핵무력 완성 이후 적극적인 대화에 나섰지만,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남한을 적대적 국가로 규정하고, 북핵을 협상 카드가 아닌 불가역적인 국가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인식은 개정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미국 중심 질서가 약화하고 북·중·러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북한은 세계질서를 다극적인 신냉전 체제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를 통일보다는 적대적 두 국가의 장기적 공존 문제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이재명 정부의 ‘2026 통일백서’는 남북관계를 ‘사실상의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다만 북한과 달리 평화적 두 국가 관계를 관리하면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보수 진영은 이를 헌법의 영토조항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비판하지만, 정부는 현실 인식일 뿐 통일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결국 흥미로운 점은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두 시각이다. 북한 지도부와 남한의 보수세력은 서로 적대적이라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북한은 두 국가의 장기 공존을 전제하는 반면에 이 보수세력은 여전히 하나의 대한민국을 전제한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이재명 정부는 ‘하나의 민족, 두 국가’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평화적 관리에 정책의 초점을 두고 있다. 과거 북측의 연방제와 남측의 국가연합 구상도 이제는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현실도 감안하고 있다.

결국 오늘의 남북관계는 상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이는 정치철학에서 오래 논의되어 온 적과 동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찾았다. 한반도 역시 이러한 정치논리가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벨기에의 정치학자 샹탈 무페는 여기서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녀는 적과 동지의 구별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상호 파괴적인 적대(antagonism)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함께 살아가야 할 경쟁자, 즉 경합적인 상대(agonism)로 인정할 때 새로운 질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호칭 문제가 새로운 쟁점 될 수도

선과 악처럼 서로 배제적인 관계도 있지만, 음과 양처럼 서로 전제하는 관계도 있다. 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므로 저것이 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불가의 연기(緣起)로서도 이런 발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의 남북관계가 직면한 과제도 여기에 있다. 서로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공존하며 경쟁할 수 있는 상대로 볼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남북이 서로 지칭하는 이름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를 어떤 존재로 인정할 것이냐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명칭의 변화가 단순한 선전이나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 남북 간 접촉이 재개되더라도 출입 절차, 체육·문화 교류, 경제협력, 국제기구 활동 등 모든 영역에서 상대를 어떻게 호칭할 것인가가 새로운 쟁점이 될 수 있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이 갈등을 완화하는 정치적 완충장치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서로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충돌을 관리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와 규범이 요구되고 있다. 결국 명칭의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공존의 기술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던 국가들이 상호 인정과 명칭의 조정을 통해 갈등을 완화한 사례는 적지 않다. 서독과 동독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던 시기를 지나 기본조약 체제를 구축했고, 중국과 대만도 정치적 대립 속에서 ‘대만지구’와 ‘대륙지구’라는 나름의 호칭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한반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남과 북, 남측과 북측, 남한과 북한, 남조선과 북조선, 한국과 조선, 남녘과 북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명칭이 공존해왔다. 때로는 상대를 부정하고 비하하기 위해 ‘괴뢰’와 같은 표현까지 동원되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의 차이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 정통성과 통일, 적대와 공존의 기억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언어다.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이름이 영원한 분리의 상징이 될지, 경쟁하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출발점이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쩌면 한반도의 미래는 국경선의 위치보다 서로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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