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흥망성쇠시리즈] ➅  ‘선도적 비전vs느린 손절’ SK네트웍스의 구사일생

최형철 기자 2026. 6. 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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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에서 AI까지, 70년 업력 생존 본능
3조원 손실 딛고 AI로 재 도전, 구사일생
'과감한 베팅ㆍ느린 철수' 반복되는 자화상
SK네트웍스 사옥 전경. SK네트웍스제공
| 서울=한스경제 최형철 산업국장겸 대기자ㆍ이기민 ESG행복경제연구소 부소장 | '지옥에서 천당으로.' 
이 문구는 대역전 드라마를 묘사할 때 숱하게 소환된다.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지만, 예측불허의 수로 승기를 뒤집었을 때 흔히 인용된다. 우리 기업사에도 이런 사례가 종종 발견된다. 현 SK그룹의 모태 SK네트웍스(구 SK글로벌)의 눈부신 변신은 특히 도드라져 보인다. SK네트웍스의 업력 70년은 직물→무역→글로벌→구조조정→서비스→AI로 이어지는 숨가쁜 변신의 연속이었다. 좋게 표현하면 기업 생존 본능의 몸부림이지만,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려는 조급함의 단면이기도 하다.
SK글로벌은 1953년 4월 섬유기업(선경직물)으로 출발했다. 한국전쟁 여파로, 온 나라가 춥고 배고플 때였다. 의식주가 태부족한 상황에서 선경직물은 입을 것에 집중했다. 실제 60~70세대의 학창시절 교복 브랜드 '스마트'로 익숙한 기업이다. SK글로벌은 1976년 선경직물에서 ㈜선경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종합 무역상사로 한 단계 도약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경쟁사들이 비상경영으로 움츠려들 때 선경은 SK상사로 이름을 바꾼 뒤, 2000년에 SK글로벌로 다시 한 번 개명했다. 이어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섰다. 경영진의 역발상은 적중했다. 1998년 자산 총계가 전년 대비 1조 4488억 원에서 3조 6242억 원으로 2.5배 급증했다. 2001년에는 무려 11조 5493억 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매출액도 1997년 6조 원에서 2001년 22조 원으로 3.7배 늘어났다. 
※ 단위: 억 원. 자본총계 '-' 표기는 완전자본잠식을 의미
빛이 있으면 어둠도 따라오는 게 세상 이치다. SK글로벌의 급성장의 이면에는 심각한 재무적 취약성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부채비율은 1997년 313%에서 4년 만에 1038%(2001년)로 수직 상승했다. 투자유가증권(주로 해외 종속기업 지분)은 2001년 2조 9419억 원에 달해, 자산의 25.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SK글로벌은 미국과 홍콩, 유럽 등 세계 각지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FRN(변동금리채권) 발행, 무역금융, 지급보증 등 복잡한 금융구조로 자금을 조달했다. 일례로 2002년 연말까지 12개 해외 관계사에 대한 지급보증 총액은 2조 9709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리스크 관리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해외 법인의 부실은 3년 이상 재무제표에 반영되지 않은 채 은폐됐다. 결국 임계점에 도달해서야 부실규모가 드러났고, 자본금의 7배가 넘는 손실을 일시에 털어내야 했다. 그 해 연결 감사보고서에는 '당사와 그 종속회사는 해외 종속회사의 자산 중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3조 4876억 원에 대하여 2002년에 전액 상각하고 기타특별손실로 계상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2002년 한 해에만 해외법인에서 발생한 3조 4876억 원의 특별손실은 자본금 4913억 원의 7배에 달하는 사실상 사망 선고를 의미했다. 이로써 자본총계는 마이너스 3조 4173억 원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SK글로벌의 재무적 재앙 이면에는 SK그룹 특유의 의사결정 기구인 수펙스(SUPEX) 추구협의회의 구조적 결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수펙스의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철학은 계열사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사결정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회색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규모 손실이 났을때는 책임소재를 놓고 계열사와 그룹의 관계가 애매모호해진다.  
SK글로벌은 2003년 주채권은행 하나은행을 포함한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갔다. 감사인은 SK글로벌에 대해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능력에 대한 중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SK글로벌은 '죽음의 문턱'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5조 3744억 원 규모의 대수술이었다. 채권단은 울며겨자먹기로 2조 원이 넘는 빚을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전환을 감행했다. 지주사 SK㈜는 8500억 원 규모 유상증자로, 지분 50.36%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등재됐다. 이 과정에서 1조 6611억 원의 채무면제이익은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  
회사는 오욕의 이름인 SK글로벌을 폐기하고 'SK네트웍스'로 사명을 변경하며 유통과 서비스 기반 기업으로 처절하게 재탄생했다.
SK네트웍스는 무역상사 모델에서 벗어나 정보통신 단말기 유통, 자동차 경정비(SK스피드메이트), 환경가전 렌털(SK매직), 렌터카(SK렌터카), 호텔ㆍ리조트(워커힐), 중고폰 거래(민팃)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2007년에는 자산총계 7조 1359억 원, 매출 18조 3582억 원으로 위기 전 규모를 회복했다.

현재 SK네트웍스는 'AI 사업지주회사'로의 대전환을 진행 중이다. 주력 캐시카우 SK렌터카를 매각하고 민팃과 SK일렉링크 등의 지분을 정리해 확보한 실탄을 업스테이지와 엔코아 등 AI 생태계 구축에 투입 중이다. 업스테이지는 거대언어모델(LLM) '솔라'를 개발한 스타트업이다. 지난해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대표 AI'에 스타트업 가운데 유일하게 포함됐다. 올해 하반기 IPO(기업공개)를 앞두고 있다. 엔코아는 AI 데이터 전문 기업이다. 이제 AI라는 미지의 영역에 던진 세 번째 베팅이 진정한 도약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경영 수업료 납부로 끝날지는 오직 AI 기술의 실질적인 수익화 여부에 달려 있다. 
지난해는 매출 6조 7451억 원, 영업이익 863억 원, 당기순이익 500억 원을 거뒀다. 수익 규모는 줄었지만 재무 건전성은 회복됐다. 부채비율도 149%까지 낮추며 재무적 수치는 안정권에 진입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사업 경쟁력이 아닌 우량 자산을 매각해 얻은 결과라는 점에서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올해 1분기 매출액 1조7434억 원, 영업이익 334억 원으로 컨센서스를 상회하는 실적을 보였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6.5%, 영업이익은 102.4% 증가한 수치다.
이런 가운데 정작 SK그룹은 'SK글로벌의 사례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따가운 질책을 듣고 있다. '선도적 비전'과 '한없이 느린 리스크 관리'라는 고질적인 패턴이 SK그룹 기업문화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SK그룹은 2010년대 후반 공격적인 해외 투자 전략을 펼쳤다. 동남아, 미국, 유럽의 유망 기업 지분을 대거 사들였다. ESG 바람을 타고 전기차ㆍ배터리ㆍ친환경 인프라에 수십조 원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은 종속기업들을 양산했고, 2019년 4조 원에 육박하던 유동자산이 2025년 1.8조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2024년부터 본격화된 SK그룹의 리밸런싱은 20여 년 전 SK글로벌 사태의 데자뷔다. 앞서 2021년에도 수펙스협의회 의장이 회생 불가 상태의 계열사에 증자를 강행하는 등 과거의 부실 지원 패턴이 여전히 그룹 내부에 잠재해 있었다.
SK네트웍스라는 창을 통해 본 SK그룹의 투자실패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큰 그림 선도' vs '실행 리스크 관리' 불균형이다. 글로벌 확장(1990년대), ESG(2010년대), AI(2020년대) 모두 시대를 선도하는 방향 설정이었지만, 개별 투자 단위의 수익성 검증과 출구전략 부재로 손실이 과대화 됐다.
둘째, 사후약방문 식 대응이다. SK글로벌 사태에서도 2003년 부실징후기업 인정전까지 3조 5000억 원 규모의 해외법인 부실이 재무제표에 반영되지 않았다. 2024년 리밸런싱도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부채 7조 원 감축에 나섰다.
셋째, 수업료의 반복 납부다. 1차(2000년대) 수업료가 3조 4876억 원, 2차(ESG 오버슈팅) 수업료는 수십조 원 규모 손실 및 구조조정 비용을 꼽을 수 있다. 3차(현재 AI 투자) 수업료는 신사업 관계기업 상당수가 적자 지속상태다.
결국 기업의 실력은 '무엇에 베팅하느냐'보다 '어떻게, 언제 빠져나올것인가'라는 포트폴리오 관리 역량에 달려있다. 업계에서는 SK그룹의 기업문화에 대해 "입구 전략은 누구보다 과감하지만 출구 전략이 항상 늦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SK의 경영 스타일은 '선도적 비전과 느린 손절'의 패턴을 반복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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