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말라가는 유엔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6. 6. 2. 07:03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5월18일 일본을 방문해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와 만났다. 오는 12월31일 임기가 끝나는 구테흐스는 다카이치에게 “유엔 활동에 대한 일본의 지원에 감사를 드린다”며 “앞으로도 유엔 개혁을 위한 일본의 노력을 고대한다”고 말했다. 꼭 1년 전 구테흐스는 독일을 찾아 갓 취임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구테흐스는 “세계에서 독일의 리더십과 목소리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유엔 운영을 위한 분담금 액수로 따져 일본은 3위, 독일은 4위에 각각 해당한다. 구테흐스는 구체적 언급을 피했으나, 실은 유엔 재정에 대한 두 나라의 더 큰 기여를 당부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랫동안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유엔 분담금을 많이 내는 나라였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일본을 추월하며 2019년부터는 중국이 2위로 부상했다. 중국은 1971년 대만을 밀어내고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덩달아 대만이 갖고 있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도 승계했다. 오랫동안 중국은 유엔 내부에서 자국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엔 분담금을 꼬박꼬박 내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유엔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가 전과 달라졌다. 유엔 산하의 여러 기관이 중국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자 심기가 불편해진 탓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유엔의 인권 관련 프로그램에 최소한의 자금만 지원하는 태도를 고수하는 중이다.
1945년 유엔 창설을 주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유엔 회원국들을 독려해 한국을 지원하도록 했다. 세계 각국 군대로 조직된 유엔군사령부는 미군 장성의 지휘를 받았다. 그랬던 미국은 1960년대 이후 유엔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대체로 사회주의 노선에 경도돼 반미(反美)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엔의 갈등은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1992∼1996년 재임) 시절 극에 달했다. 갈리는 애초 연임이 유력했지만 그를 ‘반미주의자’로 간주한 미국의 거부권 행사에 가로막혀 1996년을 끝으로 유엔을 떠나야 했다.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자’답게 유엔을 경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미국은 유엔 분담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나라로, 유엔 예산의 약 22%를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미국은 42억8000만달러(약 6조4000억원)가 넘는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다. 그로 인해 유엔의 재정은 빠른 속도로 악화하는 중이다. 오죽하면 유엔 스스로 “현금 잔고가 오는 8월 중순이면 바닥날 것”이라며 위기를 호소했다. 2022년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등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유엔을 두고 ‘무용론’(無用論)이 제기된 바 있다. 이제는 유엔 무용론 차원을 넘어 유엔 파산(破産)마저 우려될 지경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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